사람의 온기와 생명이 깃든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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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흔적 / 유이화

제주도 포도호텔. 제주의 오름과 초가집을 모티브로 한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작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포도송이처럼 보인다. 미세움 제공

여러 채 모여 있는 모양이 꼭 포도송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포도호텔. 제주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름과 제주 전통 초가집을 모티브로 했다. 억새 사이로 포도처럼 송이송이 이어진 포도호텔의 모습은 제주도의 자연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 호텔은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1937~2011)의 작품이다.

그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한민국이란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이방인이라는 시선과 귀화에 대한 유혹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 세계를 다졌다. 덕분에 김수근문화상, 무라노도고상을 비롯해 프랑스에서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를 받고 현대 미술과 건축을 아우른 세계적인 예술성을 지닌 건축가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적인 건축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2011년, 왕성히 건축 활동을 하던 중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미술 아우른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
딸이 에세이·드로잉 모아 작품집으로


손의 흔적 / 유이화
그의 건축 사상과 철학을 담은 책 '손의 흔적'이 나왔다. 이타미 준의 건축 작품과 드로잉, 스케치, 메모, 에세이를 그의 건축 파트너이자 딸인 유이화(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 씨가 모아 작품집으로 엮어냈다.

그는 생전에 달항아리와 같은 건축,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건축, 손과 몸의 온기가 묻어 있는 건축, 그 지역의 특성과 재료를 어우러지게 한 건축을 만들고자 했던 건축가였다. 이런 그의 건축 사상과 철학은 1970년대 일본에서 펼친 작업부터 최근의 제주도 프로젝트까지 40여 년에 걸친 작업을 아우르는 드로잉과 스케치, 그가 남긴 수많은 메모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타미 준은 어머니의 땅, 붉고 차진 흙에 매료되어 황토로 지은 시골집과 곳간을 둘러보러 다니기도 했다. 지역성과 토착성이 짙은 시골집과 흙의 조형물인 한국의 무덤을 보고 자연에서 얻은 야성의 소재인 흙으로 '온양민속박물관'을 지었다. 서울 평창동 타운하우스 '오보에 힐스'는 옥상 녹지를 통해 자연주의 주택을 구현해 냈다.

이타미 준에게 제2의 고향은 제주도였다. 말년의 제주도 작업은 이타미 준 건축의 원숙미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풍·석(水·風·石) 미술관, 포도호텔, 방주교회 등 1990년대 후반 이후 제주 작업에는 자연과 동화된 건축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다. 특히 수·풍·석미술관은 '돌과 바람의 조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이타미 준의 건축 속에 가장 강하게 구현된 것은 '사람들의 온기와 생명'이었다. 이타미 준은 책 속에서 "무엇을 밑바탕에 둘 것인가? 사람의 생명, 강인한 기원을 투영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태어날 수 없다"라고 스스로 묻고 답한다.

그의 '글과 드로잉'에는 '그 땅에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이의 삶과 융합한 집을 짓는 것이 건축철학이며, 건축가는 도공의 마음과도 같이 무심으로 건축해야 한다'던 건축가의 울림이 묻어 있다. 유이화 엮음/미세움/240쪽/1만 9천800원.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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