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마을기업 '희망나눔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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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인생 '광' 내 봅시다" 희망을 닦는 사람들

지난달 30일 오전 부산지방국세청 민원인 주차장에서 국내 1호 노숙인 자활기업인 희망나눔세차 서영준(왼쪽) 팀장이 노숙인들과 함께 세차 작업을 하고 있다. 김병집 기자 bjk@

세차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있다.

한때 선원, 공장 근로자, 회사원으로 살았던 평범한 인생들이었다. 그러다 실직과 이혼, 질병을 겪으며 범상치 않은 인생이 시작됐다. 길에서 먹고 자던 그들을 사람들은 '노숙인'으로 불렀다. 세상은 노숙인에게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줬지만, 평범한 예전의 삶은 쉬이 되돌려 주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갈 길은 없어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차를 닦고 광을 내는 일은 돈벌이 이전에 다시 그 세상으로 돌아갈 실마리 같은 것이다. 세차로 희망을 빚고 닦는 '희망나눔세차' 사람들을 만났다.

정부 주도 전국 1호 노숙인 자활사업
종이컵 한 잔 물로 친환경방식 세차
저렴한 가격·SNS 홍보로 고객 '쑥'
"사회적 기업으로 거듭나는 희망 품어"

■희망 빚는 노숙인들의 세차


지난달 30일 오전 9시. 부산지방국세청 민원 주차장이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장사진을 이룬 자동차 사이로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걸레와 물통, 분무기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희망나눔세차에 몸담은 지 가장 오래된 김 모(47) 반장이 세차용 '에어 건'으로 이리저리 차량 보닛 위에 분사했다. 차량에 낀 때의 정도에 따라 에어 건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오래 전 경기도 부천시에서 세차 일을 해봤다는 김 반장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에어 건이 지나간 곳은 차량 본래 색깔이 되살아났다.

옆에 있던 최 모(51) 씨가 김 반장의 초벌 세차가 끝나자 왼손으로 부지런히 유리창을 닦는다. 한때 금속공장에서 일했던 최 씨는 작업을 하다 오른손을 잃었고, 몇 해 전엔 주물공장에서 일하다 주물이 튀어 왼쪽 눈을 실명했다.

반대편 창유리를 닦는 정 모(45·여) 씨는 희망나눔세차팀의 유일한 여성. 7~8년 전부터 자갈치 시장 일대에서 먹고 자다가 지난 2월 말 희망나눔세차에 합류했다.

같은 차를 세차하지만, 노숙인들의 이력과 노숙인이 된 사연은 달랐다. 그들이 품은 소망과 다가올 미래상도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이들은 세차로 인연을 맺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 차 한 대를 닦은 만큼 내일은 더 밝아질 것이라는 믿음에 그들은 차를 닦는다.

희망나눔세차 팀원들이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 김병집 기자

■정부 주도 제1호 노숙인 자활사업 세차팀

사실 희망나눔세차의 일등 공신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서울의 한 쪽방촌을 방문해 '쪽방 주민의 자활사업'에 관심을 나타냈다. 당시 안전행정부는 전국 10여 곳 쪽방촌 재활상담소에 공문을 보내 마을기업 추진의사를 타진했다. 이 가운데 부산 동구 초량동에 있는 '동구쪽방상담소'가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면서 희망나눔세차가 태동하게 됐다.

세차를 하겠다고 자원한 노숙인들은 대전까지 가서 세차 기술을 배우고 장비를 샀다. 한 달간 준비 작업 끝에 지난해 10월 30일 전국 최초의 쪽방 주민 자활 마을기업 희망나눔세차가 출범했다. 처음엔 활동가 1명과 노숙인 2명으로 출발했다. 정부로부터 2년간 8천만 원의 사업비도 지원 받았다. 유정복 당시 안행부 장관이 방문할 정도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삶의 의욕을 잃은 노숙인들이 일할 의욕을 계속 가지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것이었을까?

팀원 간의 불화도 잦았고, 무엇보다 일감 확보가 만만치 않았다. 약 1개월 만에 초기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희망나눔세차는 사실상 해체 위기를 만났다.

다행히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쉬던 서영준(49) 팀장이 지난해 12월 세차팀을 이끌면서 새롭게 팀을 꾸렸다. 노숙인 팀원도 2명에서 5명으로 늘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블로그를 통해 홍보도 강화했다. 1회용 종이컵 한 잔 정도의 물만 써 친환경적이고, 공기 회오리 분사방식이라 차량에 세차 흠집이 전혀 없다는 점도 알렸다. 세차비도 일반 세차장보다 20~30% 할인하면서 가격경쟁력도 갖췄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골 손님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한국전력 부산본부, 부산국세청, 연제구청 등과 정기 세차 계약을 맺으면서 고정 물량도 확보했다. 그 덕분에 요즘은 매월 400만 원 중반대의 수익을 내고 있다.



■당신의 세차는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장부상으론 희망나눔세차에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씩 오고 있지만 아직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팀원 전체가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다 보니 여차 하면 세차를 그만둘 수도 있다. 종일 세차를 해서 번 돈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돌아가면 받는 급여(매월 50만 원가량)의 유혹도 근로의욕을 꺾을 수 있다. 인내심과 공동체, 타인에 대한 관계력 회복도 변수이다. 애초 희망나눔세차를 통해 자활에 성공한 노숙인이 나오길 바랐지만, 아직 한 명도 그런 사람이 없다는 점은 이런 걱정에 설득력을 더한다.

"노숙인들도 우리 사회 구성원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버려진 존재'처럼 인식되고, 이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불편한 시선과 오해도 여전합니다. 노숙인들이 자립과 자활을 통해 새 삶을 살게 하려면 노숙인을 위한 정부, 지자체의 프로그램과 일반인들의 공감과 따뜻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서 팀장의 당부다.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말미에 서 팀장은 조만간 카셰어링 기업 '쏘카' 등에서 매월 100여 대를 세차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전했다. 그 물량만 확보되면 수익도 상당히 늘어난다. 서 팀장이 꿈꾸는 희망나눔세차의 '사회적 기업'화도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서 팀장과 노숙인들은 지난 31일 오전 희망나눔세차 사무실에서 조촐한 1주년 기념식을 했다. 이들은 '희망을 품고 견뎌야 우리가 이긴다"며 다시 차를 닦으러 나갔다. 세차 문의 051-462-2064.

전대식 기자 pr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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