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원전, 암 발병 영향줬다] 소송 승리 이끈 이진섭 씨 "수도권 위험해 원전 안 된다?… 지역민 무시에 외로운 싸움 결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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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일부 승소한 이진섭(왼쪽) 씨가 자신의 암과 아들 균도(오른쪽) 씨의 자폐성장애 발병 원인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지난 17일 오전 10시 10분 부산지법 동부지원 민사2부(최호식 부장판사) 법정.

"피고는 원고에게 1천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본보 지난 17일자 1면, 18일자 1·2면 보도)이 나오는 순간, 원전 관련 소송 제기 이후 2년을 기다려 온 원고 이진섭(50) 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비록 일부 승소였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이 씨는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 갈 때 너무 놀랐다. 그동안 정부가 친원전 성향을 줄곧 보였기 때문에 사실 이번 재판에 큰 기대를 걸진 않았다"며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소송인데, 원전을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의 책임을 인정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 뿌듯하다"고 감격해 했다.

부부 이어 장모까지 암 발병
아들 발달장애도 관련 가능성
"원전 위험성 알리는 게 목적
주민 대표한 소송 끝까지"

원자력발전소 관련 소송에서 기념비적인 일부 승소를 이끌어 낸 이 씨의 고향은 부산 해운대구 송정동. 평범한 직장이었던 그는 1990년 기장군이 고향이었던 부인 박 모(48) 씨를 만나 기장군 일광면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3년 뒤인 1993년 아들 균도(22) 씨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들은 1급 자폐성장애라는 발달장애를 안고 세상에 나왔다.

이 씨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원전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원전의 심각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균도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였다"고 회상했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이 씨도 2011년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병원에 다니면서 고리원전이 있는 기장군 사람들이 유독 암에 많이 걸려 병원 치료를 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다 2012년 초 부인마저 갑상선암에 걸렸다.

이 시기에 이 씨는 병원에서 "부모가 큰 문제가 없더라도 환경적 요인에 의해 자녀가 발달장애를 앓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때마침 서울대 의학연구원의 역학조사에서 원전 인근 여성의 갑상선암 발병률이 다른 지역의 2.5배에 달한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이 때 이 씨에게는 원전 인근에 거주했던 장모 이 모(75) 씨도 2009년 위암 수술을 받은 사실이 떠올랐다.

이 씨는 "퍼즐이 맞춰지듯 원전과 암의 상관관계가 머리 속에 확연히 새겨졌다"며 "하지만 한수원에 위자료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직접적인 계기는 한수원 사장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었다"고 말했다.

2012년 초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1주년에 이어 국내에 대규모 원전 납품비리가 알려지기 시작한 때다. 게다가 고리1호기 정전사건도 터졌다.

이 해에 '반핵' 움직임이 거세지자 4월에 당시 김종신 한수원 사장은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하다 "수도권은 인구밀집 지역이어서 원전 부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이 씨는 이 보도를 접하고 소송을 결심했다. 불안하게 원전을 끼고 사는 지역민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이 씨가 직접 행동에 나서게 된 것.

이 씨는 "2012년 7월 3일 나와 아들, 부인 3명 명의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는데 관심이 뜨거웠다"며 "하지만 곧 세간의 관심이 끊겼고 외로운 싸움이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다만 뜻있는 지역 변호사들이 무료 변호에 나서준 게 이 씨에게 큰 힘이 되었단다. 정부가 친원전적인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지만, 그는 2년 동안 부산과 서울을 힘들게 수시로 오가며 원전 관련 자료들을 모아 법원에 제출했다.

그는 지난 6·4 지방선거에 기장군의원 후보로도 출마했다. 오로지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낙선했다.

이 씨는 향후 계획에 대해 "어차피 돈이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원전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끝까지 가겠다"고 밝혔다. 일부 승소에 그치지 않고 변호인과 상의해 항소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비록 법적으로는 이 씨와 가족들이 이번 소송의 주체이지만, 실제로는 지역 주민들을 대표한 소송인 만큼 어떤 이유로든 멈출 수 없다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지난 17일 동부지원 민사2부는 이씨 등 일가족 3명이 한수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1천5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는 원전 주변에 오랫동안 살면서 갑상선암이 발병했다면 원전 측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었다. 주민의 암 발병이 원전과 상관이 있다는 법원의 판결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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