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의 음식 이야기] 밀가루가 내 몸의 적?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부산대 미생물학과 명예교수

늘 먹던 밀가루가 최근 일부 방송과 신문을 통해 '내 몸의 적'으로 몰리면서 천하의 몹쓸 식품이 됐다. 밀가루에 들어 있는 단백질 글루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물질이 소화되지 않고 장을 뚫고 들어가 치매, 암, 면역질환, 신경계이상 등 각종 무시무시한 질병을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글루텐 성분 중 글리아딘이 장점막을 통과해 면역기능에 문제를 만들고 융모세포에 염증을 유발한다는 설에 기초하고 있다.

이 주장이 맞기는 맞다. 하지만 특수한 경우다. 글루텐이 원인인 셀리악 병(Celiac disease)에 한하는 증상이다. 그것도 얼치기들이 주장하는 무시무시한 증상이 아니라 소화불량과 설사 정도를 동반하다가 밀가루를 끊으면 호전되는 일종의 알레르기다. 서양인들 사이에 1%도 되지 않는 드문 병에 해당된다.

쌀이 주식인 동양인에게는 셀리악병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국내에는 지난해 첫 환자가 공식 보고됐을 뿐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인데도 부작용이 침소봉대되면서 밀가루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다. 국수나 빵을 먹고 체하거나 소화가 잘 안 돼도 셀리악병을 떠올리면서 밀가루 음식을 멀리하는 분위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서양의 희소병을 우리에게도 일반화시키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대중매체에서 불량지식을 퍼뜨리는 사이비 전문가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의 어설픈 주장이 여과 없이 전달되는 바람에 일반인들의 뇌리에 밀가루는 나쁘다는 게 상식으로 굳어졌다.

어떤 전문가는 "미국에서는 글루텐 불내증이 10%"라고 주장하고, 또 "미국인의 10명 중 3명 정도가 글루텐 민감성 체질이다. 취약 인자가 잠재돼 있는 사람까지 합치면 80%가 넘는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도 밀가루 민감 체질의 비중이 높다는 주장도 편다. 이런 말들은 모두 근거가 없다. 한술 더 뜨는 의사도 있다. TV에 나와 밀가루가 몸속에서 알코올 발효를 일으켜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한국인에게는 거의 없는 질병을 갖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 결국 '글루텐 프리' 밀가루만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루텐이 없는 밀가루는 점성(탄성)이 없어 국수와 빵을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빵 자체가 부풀지 않으며 쫄깃한 맛도 없다. 뚝뚝 끊어지는 국수, 부풀지 않는 납작한 빵이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추세다. 귀중한 먹거리를 오락거리쯤으로 여기는 한심한 작태를 경계한다. leeth@pusan.ac.kr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