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귀향(歸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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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계절.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가을이 일궈낸 풍요에 대한 칭송이다. 또한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그리운 대상 가운데 고향만 한 것이 있을까. 귀향, 그 회귀 본능을 저지당한 이들의 상실감을 겪어 보지 않은 우리는 느낄 수 없다.

타국살이 우리 문화재의 귀향

실향은 반드시 사람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어두웠던 우리 과거사에 휘말렸던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타향에서 귀향을 꿈꾸고 있다. 최근 국외 문화재재단 통계에 의하면, 고향을 떠난 우리 문화재는 15만 6천여 점으로 실제는 훨씬 더 많은 문화재가 해외에 반출된 상태다. 일본에 가장 많이 반출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 문화재가 반출된 원인은 고려말 왜구 침입, 임진왜란으로 대표되는 전란, 일제 강점 등 불행했던 우리의 과거사에 있다. 아울러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와 같은 외세 침략과 상인들의 매매나 증여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외 반출문화재 환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그에 따른 성과로 조선왕실의궤, 고종황제 옥새, 정선 화첩 등 귀중한 문화재가 환수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반출문화재 환수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반출 경위가 정확하게 파악되어 약탈문화재라는 것을 입증해야 법적인 효력을 갖는데, 약탈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여기에 민간차원의 매입을 통한 환수와, 기증 또는 증여에 의한 환수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 불화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국내에 많은 작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국내에 주로 남아 전하는 불화는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 불화는 겨우 10여 점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130여 점은 대부분 일본 각지에 흩어져 전하고 일부는 미국과 독일, 프랑스에 산재해 있다. 그렇다 보니 작품을 찾아 일본 구석구석을 방문해야 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게 연구의 가장 큰 고충이었다. 학자로서의 삶에 가장 큰 축복은 이러한 고충 속에서 느닷없이 찾아왔다.

2004년 늦은 겨울, 여느 때와 같이 일본 교토의 모 사찰에 1565년에 제작된 조선전기 불화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작품 조사를 의뢰했다. 이후 조사 일정을 의논하고자 사찰 주지 스님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이 불화는 한국의 물건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려주겠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약속한 날에 사찰을 방문했을 때, 주지 스님은 작품이 들어 있는 상자와 기증문서를 나에게 내밀었다. 기증에는 아무 조건도 없었다. 단지 작품의 소중함을 아는 인연이 닿는 누군가가 한국에서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게다. 정말 꿈만 같은 상황이 펼쳐졌기에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덥석 받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모든 일에는 절차가 따라야 하기에 절차를 살펴본 후 다시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왔다. 그 이후 적법한 절차에 따라 동아대에 기증된 불화가 바로 보물 제1522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이다.

기억하기에 만남은 성사되는 것

국보급 문화재의 귀향에 내가 한 역할은 미미하였지만, 누군가가 기다리던 '인연이 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불화의 반환을 결심했던 주지 스님은 고령이었다. 만약에 내가 혹은 한국인 누군가가 그 불화를 기억하고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나를 반기지 않고, 나를 잊어버린 고향은 타향과 다름없다. 귀향은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기에 힘겨운 거북이걸음으로라도 감행하는 것이다. 만남이란 서로가 그리워할 때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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