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봉의 요리, 그 너머] ⑫ 요리, 그 너머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수행 같은…

무화과를 살짝 익힌 뒤 된장을 바른 요리. 단순한 듯 보이나 쉽게 이뤄진 게 아니며, 명상처럼 집중력이 요구된다. 박영봉·권귀숙 제공

10년 전 이야기이지만 어떤 셰프의 죽음은 묘한 뉘앙스를 남겼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유명 레스토랑에 있는 셰프였는데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미슐랭가이드에서 최고점인 별 3개를 받은,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음식점이었다.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에 군림하던 그가 어느 해인가 별 하나가 떨어진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셰프의 선택은 모질게도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모습보다 무어라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색다른 충격을 받게 된다. 그게 부끄러움 때문인지, 분노인지, 혹은 자책인지 알 수 없지만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견디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고 죽음에까지 이를 문제인가, 라고 물으면 답을 하기가 어렵다. 

입장과 상황은 다르지만 일상을 넘어서는 요리는 정신이나 의식의 영역에 속하지 싶다. 수행자의 길과 유사하다.

셰프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복잡하리란 건 분명하다. 그에게 요리는 무엇이었을까?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셰프의 죽음에서 찾을 긍정의 의미가 있다면 목숨을 거는 정신이 아닐까?

누구에게 올리는 밥상에 가장 지극한 정성이 들어 있을까?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물음일 게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임금님 수라상이 꼽히지 않을까.

오래 전 이를 소재로 한 대장금이란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누린 것도 그런 특별함이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조선 팔도의 엄선된 재료가 모이고, 뛰어난 전문요리사인 숙수들은 만인지상인 임금의 수라상에 오를 요리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매끼를 보약 수준으로 음식을 만들었을 것도 같다. 

임금님 수라상에 올린 두부전골 요리.  박영봉·권귀숙 제공

정성으로만 치면 수라상을 뛰어넘는 요리가 있다. 바로 신에게 드리는 음식이다.

예로부터 각 마을에는 수호신이 있다고 믿었다. 어지간한 마을이면 보통 정월에 당산제나 동제를 통해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정해진 제관이 있었지만 통상 대내림을 통해 결정했다.

성인이 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한 사람씩 새로 베어 온 대나무를 잡게 한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를 잡았을 때 나무가 심하게 떨리면 신이 점지한 것으로 믿었다. 이를 대내림이라 했다.

그 사람은 신이 내린 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의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외출을 삼가고 조문을 금하며 목욕재계를 하며 정성을 모은다.

음식재료는 당연히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되 절대로 깎거나 흥정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경건한 마음으로 요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앞의 어느 이야기든지 마음가짐이나 식재료에 관해서 지금의 요리인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입장과 상황은 다르지만 일상을 넘어서는 요리는 정신이나 의식의 영역에 속하지 싶다. 수행자의 길과 유사하다. 그런 선상에서 만나는 것으로 발우공양이 있다.

사찰음식이라고 하면 얼핏 자극적이지 않고 동물성 단백질을 멀리하는 채식 위주 식단을 떠올린다. 현대인에게 웰빙과 함께 힐링을 선사하는 것이다. 느림의 미학에 관심을 가지는 현대인에게 슬로푸드로도 다가온다. 하지만 발우공양은 그 이상의 의미, 즉 하나의 수행이다.

발우공양은 간결하지만 엄숙하다. 아니 우스꽝스럽게 비칠지도 모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이르는 하루의 수행 중 가장 슬픈 수행이기도 하다. 속세로 말하자면 가장 즐거운 시간을 차압당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역설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개도 밥 먹을 때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최소한의 그릇, 밥과 국그릇에다 반찬그릇과 그릇을 헹궈 마실 물을 담은 그릇, 4개가 전부다. 운수행각이라도 하려면 바랑에 가볍게 넣을 수 있도록 목기를 선택한다.

그들은 그릇에 필요한 만큼의 음식만 담는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법을 배운다. 깨달음을 위한 화두인 탐욕을 내려놓는 일이다.

굳이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 행위에는 표현할 것은 모두 드러낸다. 남기지 않음으로 재료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절제하는 모습과 고마움, 또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전하는 셈이다.

발우공양에서 요리의 맛에 취하는 것은 분명 금기일 것이다. 미각의 즐거움을 만끽한다면 그건 의도와는 다른 결과일 것이다. 맛을 추구하려 했다면 보다 화려하고 귀한 재료와 매혹적인 향신료를 구할 것이다. 수행에서 맛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식사가 끝나면 그릇에 묻은 밥 한 톨, 나물 한 잎마저 남기지 않는다. 물로 곱게 헹구어 마신다. 마지막으로 그릇을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 예의 텅 빈 상태로 돌려놓는다.

많은 수행자가 한꺼번에 식사를 한다고 해도 소란하거나 번잡함이란 없다. 식사라 하더라도 음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양을 하면서도 공양 너머에 있는 걸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듯 음식 혹은 요리, 그것을 둘러싼 세계는 대개 먹고 사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속(俗)을 넘어 성(聖)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sogo9257@hanmail.net 


박영봉

'요리,그릇으로 살아나다'저자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