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칼럼 '판'] 관객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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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모퉁이극장 대표·관객문화운동가

"나는 곧잘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단순한 영화광에서 비평가가 되고 감독이 되었는가'라고. 그건 정말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할 수 있는 한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는 것뿐이다."-프랑수아 트뤼포

영화를 사랑한 감독으로 알려진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의 명언이다. 이 글에서 관객(영화광)-비평가-감독의 관계는 발전단계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독해에는 관객을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이 뿌리내리고 있다.

예로 '비평가'와 '관객', 이 두 단어를 살펴보자. 비평가는 직업을, 관객은 영화를 보는 행위자를 가리킨다. 관객의 자리에 직업을 넣으면 '비평가와 비평가'가 될 수도 있다. 관객의 자리는 가능성이 규정된 자리가 아니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 성원이 사회구성원 대다수라는 점에서 관객은 시민과 닮았고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다는 점에서는 민중과 흡사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민과 민중의 의미 속에 담겨진 책임과 주체성, 사회적 실천의 측면이 관객의 영역에서는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탓에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관객의 위상은 소극적 의미로 축소된 대중과 소비자에 머물러 있다.

관객의 자리는 비평가나 감독보다 선행하므로 기초적이다. 그렇다고 이 성격이 초보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터는 특정 기준으로 위계 지어지는 자리도 아니며 관객에서 비평가가 되고 감독이 된다는 도식처럼 직업을 가지면 떠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사과와 배가 과일인 것처럼 비평가와 작가의 상위개념에 관객의 자리가 있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라고 했다.

만약 관객의 자리가 비평가나 작가와 분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면 이것은 사회적 통념이 불러일으킨 착각이다. 관객이 관객을 부인하고, 대상화하고, 응원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관객의 자리는 여전히 황무지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누구보다 영화를 즐겼고, 감독이 된 뒤에도 꾸준히 극장을 찾은 것을 상기한다면 그를 표현하는 최후의 한 단어는 관객이다. 그런 그의 말을 단계로 이해하기보다 끊임없는 관객의 형상으로 보고 싶다.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할수록 관객이라는 단순함에 도달한다.

김현수 모퉁이극장 대표·관객문화운동가 '인문연대 금시정'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좋은 관객들'이란 이름의 관객운동을 4년 동안 이끌다. 2012년 모퉁이극장을 설립하여 본격 관객잡지를 발간하며 관객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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