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블부블-부산블로그] '경주夜' 놀자! '남산' 달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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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 년 불국토에서 맘속 가득 행복을 품다

자연석 바위를 기단 삼아 짜 맟춘 모양이 독특한 늠비봉 오층석탑은 멀리 내려다보이는 낮 풍경도 시원스럽지만, 달빛 내려앉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접하면 더 그윽하다. 부산일보 DB

신라 천 년이 시작된 나정과 끝이 된 포석정지는 모두 경주 남산(금오산) 자락에 있다. 나는 후백제 견훤의 군대에 의해 영화의 엔딩 장면 같았던 신라의 몰락을 묻어둔 그 포석정지를 출발해 늠비봉 오층석탑과 금오정을 돌아오는 달빛 산행을 했다. 둥근 보름달이 산허리에 은쟁반 같은 모습으로 밤하늘을 채우듯 내 마음에 뭔가가 포근한 것으로 꽉 차올랐다. 아마도 이것이 행복인가 싶었다.

사실이지 나는 어떤 모임에서 경주 남산을 오르는 달빛 산행을 하자는 제안에 시큰둥했다. 부산의 금정산이나 백양산 야간 산행을 한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함께한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에 기분만 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산행을 제안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남산 달빛 산행을 함께했던 부부가 대전에 거주하는데, 산행 이후로 1년에 한 차례 이상 빠짐없이 꼭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날의 행사를 위해 포석정지 앞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주최 측에서 참가자를 호명하는데 울산 구미 대구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참가했다는 게 놀라웠다. 드디어 출발. 대략 경찰 추산도 아니고 주최 측 추산도 아닌 내 추산 100여 명의 인원이 인솔자의 뒤를 따랐다. 신록이 점점 어둠에 묻힐수록 풋풋한 풀 냄새가 농염할 지경으로 코끝에 머무르는 가운데 나는 줄곧 선두에서 인솔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걸었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처음 만난 이름 없는 다리 위에서의 첫 휴식 시간.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한 노신사 참가자가 부르는 노래를 귀에 담았다.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임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마는, 임은 어이 못 오시는가.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앙코르 송에 박수를 더 하고, 작은 절집 부흥사의 요사채엔 불빛도 조용한 가운데 일행들이 애써 아니온 듯 지나자 길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짙은 어둠 속에 얼마쯤이나 올랐을까. 능선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몇 발자국 가다가 석탑 앞에서 멈춘 순간, 와!~ 하는 탄성을 뱉어내지는 못하고 가슴에 담았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늠비봉 오층석탑의 실루엣이 주는 자태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찬 우주 같았다. 그리고 천지와 통하는 기운을 얻었음은 물론이고, 통일신라 시대에 백제 양식의 석탑을 다듬은 석공들의 혼이 서라벌과 부소산을 자유롭게 오가며 수많은 세월을 이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신비로웠다. 용장사 삼층석탑은 한낮에 산자락에 푸른 나무를 배경으로 내려 보아야 그 자태가 더 빛나지만, 늠비봉 오층석탑은 달빛이나 별빛이 내려앉은 밤에 하늘을 배경으로 만나야 금상첨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갔다. 오르는 동안 흘린 땀을 금세 앗아 같다. 개운했다. 하지만 이날 하늘은 흐렸다. 기대하는 달은 꼭꼭 숨어 있었다. 달이 있고 없고는 달과 자연의 몫이지 그것에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고, 사람의 몫이 있다면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자연 앞에서는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순응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발아래로 펼쳐진 경주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땅에 흐르는 은하수였다. 그리고 인솔자의 해설에 주목했다.

경주에서도 잘 보이는 오층석탑은 산과 산을 잇는 봉우리와 능선이 빙 둘러있어 마치 연꽃 속에 앉은 모습과 흡사 닮았다. 보통 탑은 기단석과 탑신석, 상륜부 등으로 구분되지만, 이 탑은 용장사의 삼층석탑과 같이 별도의 기단석을 생략하고 바로 남산이, 경주가, 나아가 지구가 기단이 되는 특징이 있다. 부처 입멸 후 탑에서 불상으로 변화하는 시대적 변천 과정에 관한 말씀도 하셨는데 그간 별 관심 없이 탑이니 탑이라 생각했던 나 자신의 무지가 몹시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솔자의 가곡 '석굴암'은 석굴암의 아미타 본존불을 떠올리게 했다.

다음 일정으로 금오정에 올라 또 다른 인솔자의 시 낭송 등이 이어졌다. 공제선을 따라 보이는 금오봉 봉우리가 눈앞에 있고, 이내 둥근 보름달이 애간장을 태우듯 그 모습을 살짝 드러내고 다시 숨기를 반복했다. 차라리 그 모습이 더 좋았다. 마치 단발머리에 포대기로 어린 동생을 업고 숨바꼭질하던 수줍던 소녀들의 얼굴 같았다. 착했고, 순수했고, 차디찬 가을날 떨군 잎에 눈물 글썽이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짓던 그 소녀들의 모습이 아슴아슴한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설령 둥근 보름달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해도 그 여리고 앳된 소녀들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산행하는 내내 그런 마음을 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가슴 아리게 스며드는 산 냄새를 뒤로해야 할 아쉬움이 남은 시간. 나를 품에 담아준 경주 남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연분홍 진달래가 살포시 핀 봄날이었다. 삼릉으로부터 마애관음보살상, 선각육존불, 선각마애불과 상선암을 지나 배리 들판을 굽어보는 마애불에 두 손을 모으고, 금오산 정상을 경유해 봉화대 능선을 따라 칠불암을 거처 서출지로 향했던 적이 있다. 떨군 잎이 쓸쓸한 늦가을에 역시나 삼릉으로부터 금오산에 올라 용장사지 삼층석탑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번 달빛 산행으로 남산이 나를 세 번이나 신라 천 년 불국토의 품속에 품어준 것이다.

이날의 하산 길은 임도를 따라 비교적 원만했다. 일부러 주최 측에서 나누어 주는 랜턴을 받지 않았다. 단지 이유라면 불빛이 비치는 곳만 볼 수 있으니까. 그랬다. 어둠 속에서도 마치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개망초 꽃도 선명했고, 공허한 평화가 깔린 밤하늘 아래 어둠도 풍경이 되었다. 밤 산행의 여정이 끝나가는 가운데 새들이 잠든 시간, 숲 속에서 굳이 이야기하려면 풀벌레의 울음소리보다 더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성숙이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중요한 건, 고요 속에서 배우는 긍정이었다.


김채석(바람)

을숙도에서 부는
바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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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kcs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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