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해운대, 그 태양과 모래]4.목로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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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노준기가 단골로 드나드는 목로주점에 매부리코를 가진 후배 작가가 나타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대여섯 명쯤 되는, 이른바 문인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선생님, 해운대에 놀러 가도 되겠습니까? 서울에서 아주 귀한 손님들도 오고 해서 그쪽으로 가서 한잔 할까 하는데요. 이런 말을 듣고 준기는 반갑게 바닷가에 있는 목로주점으로 오라고 했다.

"오오, 바다!"

"망망대해야."

서울에서 왔다는 귀한 손님들은 늙은 작가가 앉아 있는 탁자 주위로 몰려들면서 바다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기울어진 태양은 서쪽 하늘에서 마지막 열기를 내뿜고 있었고, 해수욕장을 메우고 있는 비치파라솔과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당신은 돈 자랑 좀 그만해
책 팔아 돈 좀 벌었다고 그렇게 으스대면 되나?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이 술집을 사느니 마느니
그런 돼먹지 못한 말을 해?
정말 돈 많은 부자들은
유치하게 돈 자랑 하지 않아요"


매부리코가 그에게 일행을 소개했는데, 그중에는 요즘 베스트셀러 작가로 한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여우처럼 생긴 여류 작가와 한꺼번에 문학상을 여러 개 받아 화제가 됐던, 고슴도치처럼 뾰쪽뾰쪽하게 생긴 사내, 그리고 외국 소설 번역본과 여우의 책을 출판해서 연달아 재미를 보고 있는 밀리언셀러 출판사 사장도 있었다.

"여기 술이 뭐가 있죠?"

매부리코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준기가 맥주를 권하자 멧돼지처럼 생긴 출판사 사장이 저만치 있는 젊은 여자를 향해 "마담!"하고 불렀다.

"마담, 양주 없어요? 생맥주 큰 거 두 개하고 스카치 한 병 갖다 줘요. 그리고 과일 안주도 두 개…."

멧돼지가 호기 있게 주문하는 것을 무표정하게 듣고 난 여자는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멧돼지 사냥하다 왔어요?"하고 한마디 하고는 홱 돌아서서 가 버렸다. 검정 미니스커트 위에 하얀 블라우스를 걸치고 앞에다 자주색의 에이프런을 두른 그녀의 물결치는 머리칼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그들은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멧돼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씩씩거리다가 담배를 뽑아 물었다.

"저 여자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기분 나쁜데 자리 옮기지. 다른 데로 갑시다."

"주문했는데 마시고 가야죠."

매부리코가 난처해하자 멧돼지가 손을 내저었다.

"취소하면 되잖아. 어이, 마담! 마담!"

여자가 다시 다가왔다.

"저를 부르셨나요?"

"그래. 조금 전 주문한 거 취소."

"전 마담이 아니에요. 마담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럼 뭐야? 여기 사장인가?"

"그래요. 여기 주인이에요."

"그게 그거지 뭐. 프랑스에서는 마담이라는 말은 귀부인을 뜻하는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한국에서는 그런 뜻으로 부르지 않아요."

"그건 그렇다 하고 아까 나한테 멧돼지 사냥하다 왔느냐고 물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예의를 갖춰서 정중히 물어보세요. 반말하지 말고."

"허어…."

멧돼지는 멋쩍은 표정으로 웃다가 늙은 작가한테 도움을 청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준기는 그를 외면한 채 비키니 차림으로 지나가는 여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 중 한 여자의 한쪽 엉덩이에는 모래가 조금 달라붙어 있었고, 그것을 본 그는 얼른 달려가 그것을 털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좋아요. 정중히 묻겠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제멋대로 날뛰는 멧돼지 사냥이 쉬울 리가 있겠어요. 더구나 멧돼지와 사람을 구별 못 하는 판에 방아쇠를 당겼다가는 큰일 나죠."

"이 여자, 갈수록 어려운 말만 하네. 그게 무슨 말이요? 쉽게, 알아듣게 말해 봐요."

그러자 고슴도치가 오른손을 내밀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 같은데요. 마담인지 사장인지도 구별 못 하는 사람이 멧돼지 사냥하다가는 사람 잡기 십상이라는 거죠."

"왜 하필 멧돼지야?"

"사장님이 멧돼지처럼 생겼다는 뜻이겠죠. 노골적으로 말은 못하고 돌려서 말한 거겠죠."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늙은 작가도 속이 시원해서 슬그머니 웃었지만 멧돼지는 끝내 웃지 않았다. 그는 당한 만큼 돌려주겠다는 생각에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잠시 후 감정에 억눌린 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 말이 맞아요? 내가 멧돼지처럼 생겼어요?"

여주인 주오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주문 취소했으면 자리를 비켜 주세요. 다른 손님들 앉게."

멧돼지는 앞발을 내흔들었다.

"아, 취소한 거 취소! 이대로는 갈 수 없으니까 주문한 거 갖다 줘요."

주오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돌아가자 멧돼지는 이를 가는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 왜 저렇게 건방져? 내 참 더러워서…."

"상대하지 마세요. 저런 여자하고 다퉈 봤자 사장님만 체면 구겨요. 닳고 닳은 여잔데 상대가 되겠어요."

베스트셀러 작가인 여우가 제법 아는 체하고 말했다. 그녀는 목걸이, 귀걸이, 팔찌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데, 가냘픈 몸매에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 그것만 해도 한 짐은 될 것 같았다.

"이 카페 사 버릴까?"

멧돼지가 카페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사 버리세요."

샌님처럼 생긴 문학평론가가 말했다.

"이거, 한 10억이면 안 되겠어? 실내라야 한 30평 정도밖에 안 되겠는데…."

돈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참에 좋은 기회가 생긴 듯 금방이라도 목로주점을 살 것처럼 폼을 잡던 멧돼지는 웨이터가 술을 가져오자 금방 화제를 돌렸다.

"폭탄주 한 잔씩 합시다. 오늘 밤은 집에 갈 일도 없고 밤새 술 마실 일만 남았으니까 느긋하게 한 잔씩 합시다. 술은 제가 얼마든지 사겠습니다."

그들은 30대에서 50대 사이로 모두가 준기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다. 늙은 작가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털어버리기 위해 그는 맥주에 위스키를 탄 이른바 폭탄주를 넙죽넙죽 받아마셨다.

"술 좀 하십니까?"

멧돼지가 곁눈질로 그를 힐끗 쳐다보면서 물었다.

"조금밖에 못합니다."

"그 뭐더라…아, 추리소설 말이에요. 선생님은 수십 년 동안 그것만 써 오셨는데 이젠 그만 쓰시고 순수소설이나 연애소설 같은 거 한 번 써 보시죠. 한국에서는 추리소설 안 됩니다. 한국인들은 감성적이라 감정에 호소해야지 추리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그런 건 싫어합니다. 한국에서는 장르문학은 안 됩니다. 그건 시간 낭비예요."

미친놈. 준기는 기분이 상해서 입속에다 얼른 술을 털어 넣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불편했다. 그런데도 멧돼지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선생님은 유명한 플레이보이라고 소문이 났던데, 그걸 소재로 해서 연애소설을 한 번 써 보시죠. 연애소설 쓰시면 제가 출판해 드리겠습니다. 상하 두 권으로 쓰시면 좋겠네요. 제가 10만 부 이상 판매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출판사 사장은 점점 자기도취에 빠져들고 있었다. 매부리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10만 부면 인세만 해서 1억이 넘겠네요. 야아, 1억이면 큰돈인데, 선생님, 생각해 보실 거 없이 지금 당장 쓰십시오. 선생님 같은 저력이면 연애소설 같은 거 일주일이면 쓰실 수 있을 텐데요."

바보 같은 놈. 이런 놈이 소설가라니! 준기는 점점 비참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여우가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담배 연기를 후우하고 내뿜고 나서 한마디 보탰다.

"연애소설 같은 거야 금방 쓸 수 있죠. 그런데 선생님이 그런 거 쓰시면 너무 세대 차이가 나서 젊은 애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요?"

"그게 문제지."

고슴도치가 말했다.

그들이 보기에 준기 같은 늙은이는 적당히 구슬리며 안줏감으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폭탄주가 들어가자 그들은 그 힘을 빌려 무례한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었다.

"공감이 뭔지 알아내고 거기다 포커스를 맞춘다는 게 중요하죠."

고슴도치가 제법 무게를 잡으면서 저음으로 말했다. 그러자 멧돼지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J일보가 독자들을 상대로 최고의 한국 작가를 선정했는데 우리 문 작가가 1위로 뽑혔어요. 아시죠?"

"아, 그래요. 축하합니다."

늙은 작가가 마음에도 없는 축하의 말을 건네자 고슴도치는 앞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씨익 웃었다.

"선생님 호가 뭡니까?"

"호는 없고 별명 같은 건 하나 있어요."

"그게 뭐죠?"

"젖은 낙엽."

"젖은 낙엽? 낭만적이긴 한데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나요?"

"에또, 그러니까 젖은 낙엽은 쓰레기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마른 낙엽과는 달리 젖은 낙엽은 땅바닥에 착 달라붙어서 빗자루로 쓸어도 잘 쓸리지 않는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하는 일 없이 마누라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영감이 보기 싫어 빗자루로 확 쓸어버리고 싶지만 착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으니 그 얼마나 귀찮겠어요. 그러니까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귀찮기 짝이 없는 처치 곤란한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왁자하고 웃었다.

"야아, 그거 기막힌 별명인데요."

고슴도치가 말했다.

"홍 작가 작품은 벌써 100만 부를 돌파했다는데요."

샌님이 과일 안주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어머나, 좋으시겠어요."

가면을 쓴 것 같은 여류 시인이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멧돼지가 능글맞게 웃으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자, 홍 작가, 한잔 합시다. 200만 부는 무난히 나갈 겁니다."

"어머, 정말이에요?"

그들은 잔을 부딪치며 축하했고, 흥분한 여우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200만 부 돌파하면 전 그날로 파리로 날아가 아파트를 하나 살 거예요!"

"브라보!"

고슴도치가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또 잔을 부딪쳤다.

"그 잘나간다는 책 이름이 뭐죠?"

젖은 낙엽의 질문이 멍청했던지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직 책 이름도 모르십니까?"

멧돼지가 힐난하듯 물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죽인 남자입니다. 아주 재미있으니까 꼭 읽어 보세요."

"알겠습니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지만 호안 도로에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들 때문에 여름밤의 분위기는 한껏 더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200만 부 운운하는 말에 잔뜩 들뜬 여우가 갑자기 고슴도치 곁으로 바싹 다가앉더니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전 오빠가 너무 좋아요! 다 아시죠? 오빠가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라는 거."

"네, 그건 맞아요. 지금 여러 사람 거론되는데 다른 작가들은 다 쓰레기고 문 작가가 가장 유력해요."

샌님이 거들고 나섰다. 폭탄주를 거푸 마신 젖은 낙엽은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그의 곁에는 키도 몸집도 작아 꼬마 소년처럼 보이는 기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는 서울서 내려오지 않고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 매부리코의 연락을 받고 기삿거리가 있을까 해서 합류했기 때문에 그들과는 별로 친분이 없는 듯했다. 고슴도치가 말했다.

"노벨상 최종심에 오르려면 작품을 스웨덴어로 번역해서 심사위원들한테 돌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데 그 번역료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에요."

"아, 번역료 걱정은 할 거 없어요. 내가 그건 댈 테니까 스웨덴어로 번역시켜요."

멧돼지가 거침없이 말했다.

"로비도 필요한 모양이에요. 그냥 입만 벌리고 있으면 홍시가 떨어지는 건 아니고 구색을 갖춰서 로비를 잘해야 심사위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같아요."

"당연히 로비도 필요하죠. 로비에 드는 비용도 내가 댈 테니까 얼마든지 로비해 봐요."

"우리 사장님, 최고예요!"

여우가 잔을 들었다.

"선생님, 건배사 부탁해요."

젖은 낙엽은 잔을 들고 그들을 둘러보았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해운대 바다여…검은 바다에 쏟아지는 달빛이여…여기 이 자리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하,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하나같이…위, 위선과 오만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이들의 불쌍한 영혼을 부, 부디 거둬 주소서!"

그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늙은 작가를 일제히 주목했다. 그러자 꼬마가 "건배!"하고 소리쳤고, 그들은 마지못해 잔을 부딪친 다음 씁쓰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아주 멋진 건배사였습니다."

꼬마가 박수를 치면서 즐거운 듯 웃었다. 반면 고슴도치의 안색은 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뭐가 위선과 오만과 탐욕으로 가득 찼다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 보고 불쌍한 영혼 운운하셨는데 뭐가 불쌍하다는 겁니까?"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매부리코가 당황해서 손을 들어 막았다.

"아아, 다른 이야기 합시다. 기분 좋게 술 마시다가 왜 갑자기 삼천포로 빠집니까? 다른 이야기 합시다."

고슴도치의 온몸 위로 뾰쪽뾰쪽한 가시가 일제히 일어서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 필요 없고 난 선생님 건배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요. 우리가 위선과 오만과 탐욕으로 가득 찬 불쌍한 영혼이란 말입니까?"

"말이 안 되죠. 선생님 실수하신 겁니다. 문 작가는 한국 최고의 작가이고 홍 작가는 밀리언셀러 작가인데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전 실망했습니다."

멧돼지가 덩달아 나를 공격했다.

"실망한 건 내 쪽이야."

"뭘 실망했다는 겁니까?"

"당신은 돈 자랑 좀 그만해. 책 팔아 돈 좀 벌었다고 그렇게 으스대면 되나?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이 술집을 사느니 마느니 그런 돼먹지 못한 말을 해? 정말 돈 많은 부자들은 유치하게 돈 자랑 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갑자기 정지해 버린 듯했다. 젖은 낙엽은 귀찮은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고 수면 위에 부서져 내리는 달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묵을 깬 것은 생각지도 않은 꼬마였다.

"선생님한테 추리소설 그만 쓰고 유명한 플레이보이니까 연애소설이나 쓰라고 말했을 때 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워낙 점잖으신 분이라 아무 말씀 안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무례하고 무식한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다른 삶을 살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작가들이 노작가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젊은 작가들이 얼마나 소설을 잘 쓰는지는 몰라도 그럴수록 겸손하고 자제하고 반성해야 하는데 자기가 세상에 최고인 양 안하무인격으로 나오면 어떡합니까? 로비 잘해서 노벨상을 받으면 뭐합니까? 그게 문학의 목적입니까? 노벨상을 받으면 그것으로 문학이 완성되는 건가요? 제발 노벨 노벨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노벨 병에 걸린 것 같아요."

"노벨상하고 문학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노벨상 받은 가와바타와 헤밍웨이가 수년 후 자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노벨상 같은 건 그들한테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어요."

내친김에 젖은 낙엽은 꼬마의 말을 거들고 나왔다. 꼬마는 보기보다는 당차고 정의로운 사내였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추리소설을 장르문학이니 어쩌니 하면서 폄하하는 말을 하던데 그건 무식해서 그래요. 장르문학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에요. 구분해서 폄하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말을 만들어 낸 거죠. 우리나라 문학인들은 생각하는 게 편협하고 옹졸하고 우물 안 개구리 같아요. 순수만 고집하고 다른 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자기 영역이 잘려 나갈까 봐 사전에 방어망을 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다른 분야, 이를테면 추리소설, SF, 판타지 같은 것들이 기를 못 펴고 죽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문학은 스스로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나르시시즘에 빠져 지내고 있어요. 그 결과 독자들은 다 달아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작품들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요.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것이 옳지 않나요?"

"옳소."

젖은 낙엽은 오랜만에 시원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꼬마는 속사포처럼 쏘아 댔다.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영국 문학의 순수성을 훼손했나요?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 때문에 영국 문학이 더욱 풍성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죽인 남자, 나도 그거 읽어 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스트셀러와 작품의 가치는 아무 관계도 없구나. 그건 소설도 아니고 사기다. 100만이 넘는 많은 독자들이 사기를 당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말조심해!"

발딱 일어선 여우가 꼬마의 얼굴에다 냅다 술을 뿌렸다.

"기자면 다야? 기자라고 함부로 말하면 되나?"

멧돼지가 물어뜯을 듯이 꼬마의 멱살을 움켜잡는 것을 보고 매부리코가 달려들어 말렸다. 분위기가 살벌해지면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마는 매부리코한테 끌려갔고, 그 밖에 젖은 낙엽한테 제대로 인사를 하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젖은 낙엽은 목로주점을 나와 백사장 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걸어갔다. 모래밭으로 내려가 얼마쯤 걸어갔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다가와 팔짱을 꼈다.

"문인들은 왜 저렇게 무례하고 무식해요?"

주오가 물었다.

"문학이 사람을 망치는 수가 있어요."

젖은 낙엽은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어디선가 음울하면서도 웅장한 베이스가 느껴지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바다의 노래였다.

■후원: 부산 해운대구


김성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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