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와 파전, 비만 오면 자꾸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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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수정시장의 막걸리주점 '고추잠자리'에서 인문학 단체들의 모임인 부산인문네트워크 회원들이 창밖의 빗소리를 배경으로 막걸리와 파전을 먹고 있다.

마른장마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장마철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세상을 적시니, 감성까지 젖어든다. 이럴 때는 퇴근 후 막걸리 한 잔이 제격이다. 너덜너덜해진 영혼이 눅진하게 적셔진다. 어울리는 안주는 한두 가지 아니겠지만 개중에 파전이 단연 으뜸이다. 그리하여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카~, 하는 막걸리 들이켜는 소리, 여기에 파전이 신나게 굽히면서 지글지글…. 추억이 되새김질되고 감성이 공명하는, 이 계절의 찰떡궁합을 음미했다.

부산 동구 수정시장 '고추잠자리'
김광석 노래 좋아하는 사진작가
막걸리로 복합문화공간 꿈꿔 
                        :
'금정산', 번철 위 파전 '지글지글'
'동래할매파전', 질척해서 매력

■아날로그 감성, 막걸리에 젖어들다


15일 초저녁. 주춤하던 장맛비가 다시 내렸다. 부산 동구 수정시장 통의 주점 '고추잠자리'(051-442-6786). 주인장 김신규(46) 사진작가가 빗방울이 때리는 유리창문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황급히 노점을 비닐로 덮는 상인들, 우산을 쓴 채 분주히 귀갓길을 서두는 주부들….

그는 개인전만 14번 치른 전업 작가다. 그 흔한 휴대폰도 없고, 아직도 카세트 테이프를 이용해 노래를 튼다. 그것도 김광석만. 1층에 탁자 3개, 2층 방은 10명이 앉으면 어깨가 부딪힌다.

사진작가가 웬 시장통 막걸리집? 뜨악하다 싶지만 얘기를 듣다 보면 그럴듯하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날로그적 정서가 흐르는 공간을 꿈꾼다. 작가로서 소통과 공감하는 공간을 내놓고도 싶었다. 그 매개로 막걸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시장통 한편에 둥지를 튼 지 꼬박 2년. 이 공간을 제 것처럼 여기는 단골이 꽤 늘었다. 통기타를 퉁기며 김광석 노래만 부르는 동인들은 매달 가게를 차지하고 음악회를 연다. 인문학 모임 회원들은 몰려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손님들끼리 의기투합해서 사진강좌까지 만들었다.

'막걸리를 통한 복합문화공간.' 그의 계획은 착착 진행 중이다. 그 모두가 '막걸리의 힘' 덕분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막걸리를 털어넣으며 마음을 트고, 서로의 이야기를 엮는다.

'좌천동 산복도로 키드'를 자처하면서 산복도로만 줄기차게 앵글에 담아 온 작가는 심지어 '산복도로 막걸리' 양조까지 시도했다. 허허. 이 분 막걸리 사랑 하나 만큼은 알아줘야겠다.

창밖의 빗줄기가 제법 굵어질 즈음 인문학단체들의 모임인 부산인문네트워크 회원들이 들이닥쳤다. "비가 오니까 너무 좋아!" 이런 날 빠질 수 없다며 막걸리와 파전을 주문했으니, 이것도 인문학적 감수성일까?

치직치직~, 툭툭~, 쏴~.

가게 안팎에서 들리는 협주에 한참을 갸웃거렸다. 부침개 반죽이 뜨거운 프라이팬에 처음 닿았을 때 나는 소리인지, 비바람이 창밖을 때리는 소리인지…. 당최 분간이 어렵다. 뒤집히면서 노릇하게 구워질 때마다 영락없이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때 김광석의 노래가 나지막히 흘렀다. '비가 내리면 나를 둘러싼 시간의 숨결에 떨쳐질까~.'

빗소리와 막걸리와 파전이 하나로 어울렸다. 비에 젖고, 노래에 젖고, 술에 젖었다. 막걸리잔은 자꾸 비기만 했다.



빗소리와 갓 지져낸 파전의 합주

빗소리를 들으며 막걸리를 마시고 파전을 씹으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장마철에 왜 하필 파전이 입맛을 당길까?

속설로 여겨지던 '비오는 날 파전'의 상관관계를 뒷받침하는 통계가 나온 적이 있다. 연전에 한 카드회사가 장마철의 결제 내역을 분석했더니 비가 오는 날 파전전문점의 매출이 최대 88%나 늘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부침개가 굽히는 소리의 음파가 비슷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그냥 어릴 때부터 죽 그렇게 먹어 와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도 정답이다. 소싯적 어느 비 오는 날에 부엌에서 엄마가 지짐이를 부칠 때 나는 소리와 향기만으로 군침을 흘린 기억이 있다면 '비와 파전'은 후천적 DNA로 각인됐다고 봐야 된다.

부침개로 부르건, 지짐이로 부르건, 어쨌거나 막 구워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오는 놈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을 때가 가장 맛이 있다. 식어 버린 파전은 서운하기 그지없다. 특히 멜라민수지 그릇 위에서 번들번들 기름기가 밴 채 차가워져 버린 부침개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 버린 애인 같다. 아무래도 파전은 정감의 음식인가보다. 그래서 꼭 따뜻해야 하는 것이다.

시각과 후각적으로, 또 식감에서 아주 독특한 파전을 만났다. 온천장 허심청 후문 앞 한식전문점 '금정산'(051-556-9911)은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서 번철로 쓴다. 해물파전 주문이 들어오면 지름 30㎝짜리 무쇠에 구웠다가 나무판에 얹어 손님상에 가져온다. 달궈진 무쇠 위에서 부침개가 계속 구워지니 치직치직 하면서 빗소리까지 난다.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찢어 먹는 동안 겉면이 가슬가슬해져 가는 게 눈에 보인다.

동래구청 옆의 '동래할매파전'(051-552-0792)은 뜨겁게 데워진 놋쇠 위에 파전을 얹어낸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질척한 파전'의 이유는 제법 알려져 있다. 찹쌀 등 곡물가루를 반죽으로 쓰기 때문이다. 밀가루만 썼을 때의 바삭함과는 전혀 다른 '덜 익은 듯한 질감'이 전통의 비법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델 만큼 뜨거워진 놋쇠와 궁합이 딱 맞는다. 마지막 젓가락을 뜰 때까지 파전은 따뜻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

글·사진=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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