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봉의 요리, 그 너머] ⑩ 커피 한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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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양탕국 한 사발!

한옥 카페인 '양탕국' 내부 모습. '대한제국을 담다'란 커다란 액자 속 글귀가 눈길을 끈다. 박영봉 제공

양탕국은 민중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며, 커피라는 원음을 사용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붙인 민족 자긍심이 있는 무형문화다. 양탕국은 우리의 커피문화와 예술, 한국적인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6월 초순 경남 하동 적량면으로 여행을 갔다. 주산지답게 산에는 온통 노란 밤꽃이 피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부서지는 시골길에는 인적은 물론이고 차량도 뜸했다. 길 도우미(내비게이션)가 인도하는 대로 찾아갔다. 도착 지점이 가깝다는 안내를 받고 좁은 길로 오르니 가로수가 길 양쪽으로 하늘을 덮고 있었다. 허, 이런 곳에 무슨 커피를 파는 카페가 있단 말인가.

"뿌리가 없는 열매를 생각해 보셨나요? 커피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선조는 흙이고 우리는 거기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카페 주인이 자리에 앉으면서 꺼낸 첫마디였다. 그리고 사발에 커피를 내왔다. 그곳은 지리산 품에 안겨 있는 카페 '양탕국'이다.

사발에 담겨 나온 커피. 박영봉 제공
'대한제국을 담다'는 특이한 표어를 내세운 카페 '양탕국'. 부조화로 들릴 수 있는 단어 조합이다. 내용을 알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름이다.

부산과 김해 등지에서 커피점을 운영하던 홍경일(49) 씨가 왜 지리산 품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부터 물었다. 그는 대뜸 "뿌리가 없는 열매"라고 했다. 그것은 단지 커피에 대한 생물학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올해 우리나라 커피시장 규모는 기준에 따라 약간씩 다르겠지만 통상 4조 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원두 수입국으로서도 세계 상위권이다. 거기에 비해 커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커피는 이미 특정한 나라의 것이 아닌 글로벌 음료가 되었다. 브라질이 원두 생산 1위라고 커피가 브라질의 음료일 수는 없다. 청자나 백자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해서 중국의 것으로만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홍 대표는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커피를 외래 문화로 인식하지 말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정체성 없는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뿌리가 없다"고 한 것이다.

커피 애호가로 잘 알려진 고종황제 이전에 이미 '양탕(洋湯)국'이란 이름으로 퍼져 있었다고 한다. '서양의 탕국'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다. 홍 대표에 의하면 양탕국이란 이름은 민중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며, 커피라는 원음을 사용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붙인 민족 자긍심이 있는 무형문화라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양탕국은 점점 일본의 아류가 되어 갔고, 일본 것을 흉내 내놓고 자기가 최고의 메커니즘이라 우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인테리어로 승부를 건다거나 누가 더 오리지널 맛인지, 독특한 맛을 낼 수 있는지 등 볶거나 내리는 기술 만을 강조하는데, 거기엔 우리다운 것이 없다고 했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커피대국이며, 최고급 품질의 원두를 생산하는 세계의 많은 농장들도 이미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고 들었다. 그들은 커피를 자신들의 브랜드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단, 한 톨의 원두도 생산하지 않는 일본이 커피 수출대국이 된 아이러니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카페라테, 카푸치노, 에스프레소 등 커피 메뉴에서 보이는 이름만 봐도 알 일이다. '메이드 인 브라질'이 아니라 '메이드 인 재팬', '메이드 인 이탈리아'다.

그는 '메이드 인 코리아'를 위해서 스토리텔링을 시작했다고 한다. 장소를 고민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모태 신앙과도 같은 지리산을 우선 생각했고, 오랜 차문화 역사를 간직한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하동이었다.

우리 민족은 사발민족이라 할 만큼 사발에 탕을 부어 즐겼다. 카페 '양탕국'의 사발 커피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양탕국이 우리의 커피문화와 예술, 한국적인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양탕국은 단순히 '커피를 사발로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적량면 동리 일대의 산자락, 커피 마을엔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옥 카페, 체험장, 게스트하우스, 카페 옆엔 아름다운 공연장도 제 모습을 갖춰 갔다. 전형적인 한옥 건물이었다. 홍 대표는 건물의 지붕을 맞배, 팔작, 우진각 지붕 등으로 설계하여 전통 건축문화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양탕국 한옥. 박영봉 제공
커피를 담는 그릇인 사발을 만드는 가마도 있으며 체험도 할 수 있다. 커피와 관련한 기술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양탕국과 우리 그릇', '한지 공예 체험' 등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연잎밥 등 간단한 요리도 내놓고 있지만 앞으로 좀더 개발할 예정이란다.

뿐만이 아니다. 지리산 근방에서 생산하는 건강한 농산물이나 양탕국에서 생산하는 효소, 건나물, 커피, 장류 등의 직매장을 운영하여 농민과 도시민 사이의 교류를 마련하고 있다. 딸기나 고구마 등 커피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는 직접생산을 원칙으로 한다. 시작단계지만 아라비카 종 커피나무 수백 그루를 심어 재배하고 있다. 커피 수출까지도 생각한다는 야심 찬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한국 커피의 정체성이란 마치 고려 상감청자처럼 우리다운 뿌리였다. 그는 마실 거리 하나를 말하고 있지 않았다.

요리가 음식에 한한 게 아니듯 커피, 아니 양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탕국을 씨앗으로 하여 그를 둘러싼 우리의 문화를 알아가고 즐기자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커피에 덧씌워진 양탕이라는 의미를 양탕국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벗기고자 하는 것이다.

흔한 말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지난 9년 간, 양탕국이란 생소한 이름을 내걸고 던진 도전이 한국의 향기로 퍼져나가기를 바란다. sogo9257@hanmail.net 


박영봉


'요리,그릇으로 살아나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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