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 예산 수덕사·추사고택
흔들리며 사는 게 삶… 추사·고암을 만났다
예산은 예절 바른 사람들의 땅이었다. 고려 태조 때다. 왕건은 그 땅에 예와 덕을 갖춘 백제 유민을 모았다. 백제부흥운동 거셌던 그 땅이 잠잠해지길 바라서였다. 그 땅은 이후 고려 예산현으로 불렸다. 그러나 백제의 흔적을 지울 순 없었다. 그 땅 서쪽 수덕사는 기어코 백제계 곡선미로 찬란했다.
예산은 살기 좋은 땅이었다. '택리지' 저자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을 내포라 했다. 가야산 둘레 열 고을이 내포였고 예산은 그중 한 고을이었다. 땅 기름졌으니 부자가 많았다. 영조의 부마도 그 땅에 향저(鄕邸)를 두고 살았다. 향저는 추사 김정희를 낳고 훗날 추사고택으로 개명했다.
수덕여관 암각화에 이응노의 자취
한글 자모 뒤엉킨 추상화서 발견한 삶의 의미
터가 센 추사고택 옆 김정희 무덤
삶의 철학 다졌을 추사 떠올려
옛 모습 잃은 수덕사, 대웅전에 마음 달래
수덕사와 추사고택은 무릇 이러하다. 그 땅의 아득한 이야기를 함성 지르듯 펼친다. 고건축 언저리를 맴도는 지극한 사랑은 덤이다. 그러나 그 덤이 가슴에 오래 밟힐 게다. 느닷없는 이별에 울음 눌러 울었을 수덕여관 박귀희 여사와 화순옹주. 시대 달랐어도 도대체가 한결같았던 그네의 그리움은 아름답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듣는 수덕사 목탁음은 그래서 깊은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수덕사
'수덕사는 번거로운 도회지 생활에서 벗어나 늘 찾아가 보고 싶던 곳이었다.' 1989년 작고한 고암 이응노 화백은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다. 수덕사는 그에게 정신적 고향이었다. 그는 홍성 출신이다.
수덕사는 정확한 창건 연대가 남아있지 않다. 그저 백제 위덕왕 시절로 짐작된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수했고 만공선사가 중창했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이다.
수덕사의 백미는 대웅전이다. 1937년 해체 작업 중 1308년 세웠다는 묵서명이 발견됐다. 고려시대 목조건물인 셈. 그 무렵, 옛 백제 땅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운동이 일었고 대웅전은 고려시대 것임에도 백제 것의 우아함이 담겼단다. 문화해설사 송애순 씨 설명이다. 우선 'ㅅ'자 맞배지붕은 단정하고 간결하고 힘차다. 허리 살짝 부푼 배흘림기둥과 곡선이 살아있는 공포는 아름답다. 문득 떠오른 한 건축가의 말. '건축 부재는 아름다움이 목적이 아니라 쓰임새의 결과로 아름다울 뿐이다.' 대웅전 측면과 후면은 정면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뭐랄까, 정면이 옷 여민 엄숙함이라면, 측면과 후면은 단추 푼 편안함이랄까. 기둥과 들보가 이음과 맞춤으로 서로에게 의지해 완전한 면분할을 선사한다. 목탁소리 들으며 한참을 붙들렸다.
수덕사는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중창불사가 과해서라 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망가졌다' 했다. 그런데도 수덕사를 무한대로 사랑한다 했다. '으리으리한 사찰로, 화려의 극을 달리고 돈 냄새 물씬 풍겨 슬프지만 아무리 망가져도 거기에 대웅전 건물이 건재해서'다.
수덕사는 중창주 만공선사의 절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수덕사 품은 덕숭산 중턱부터는 아예 '만공숲'이다. 수덕사 말사 정혜사, 산내 암자 견성암 모두가 그의 공 아닌 게 없다. 한 전각에 걸린 편액 '세계일화'는 그의 글씨다. 해방 소식 듣고 무궁화꽃에 먹을 묻혀 썼다. 세상은 한 송이 꽃. 너와 네가 둘이 아니다.
수덕사 일주문 왼쪽 숲에 터 잡은 수덕여관은 지어진 시기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고암의 본부인 박귀희 여사에겐 전부였음은 분명하다. 고암이 1944년 여관 사들인 후 박 여사 두고 프랑스로 떠났을 때도, 고암이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도, 고암이 옥살이 후 요양할 때도 박 여사는 여관과 고암을 돌봤다. 박 여사의 곡진한 챙김에도 고암은 다시 파리로 떠났다. 짧았던 봄날 붙들고 여관 지킨 박 여사는 2001년 눈을 감았다. 고암이 수덕여관 요양 시절 앞뜰에 암각화를 남겼다. 한글 자모 뒤엉킨 듯한 추상화였다. 고암은 "이게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했단다. 하긴 엉키지 않은 삶이 어디 흔한가. 그래서 산다는 건 흔들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는지. 참, 수덕여관은 경매에 붙여져 지금은 수덕사 문화 전시공간으로 쓰인다.
■추사고택
추사 생가인 추사고택은 권위적이다. 입구에서부터 솟을대문이 우뚝 섰다. 집채와 뜰을 오르내리려면 돌층계를 밟아야 한다. 일종의 격절이다. 안채도 다르지 않다. 마당과 마루의 높낮이가 심하다. 신분 나눈 조치였다. "마루에서 마당 쪽을 내려 보시죠." 문화해설사 박순병 씨가 마당에 서고 기자는 마루에서 그를 굽어봤다.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자의 시선이 확연하다.
조선 명문가의 한옥 맛을 느낄 수 있는 추사고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