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해운대, 그 태양과 모래] 3.여름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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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나는 몸을 파는 여자. 사람들은 나를 콜걸이라고 부른다. 흥,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짓으로 밥을 먹고 자식 둘을 학교에 보낸다.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던져 보라지.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은 날이다. 한마디로 재수 옴 붙은 날이다. 하필이면 그자가 고객이라니. 그것도 20여 년 만에 호텔 방에서 만나다니. 나는 그자를 금방 알아보았지만 그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20여 년 전에 그와 딱 한 번 관계를 가졌을 뿐인 데다 그동안 두 번이나 성형 수술했으니 내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다.

대학에 갓 입학한 풋내기 여대생인 내 눈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지식이 풍부한 젊은 교수였다. 그에게 반한 나는 거의 내던지다시피 내 몸을 그에게 바쳤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나를 먹어 치웠다. 딱 한 번 그렇게 나를 건드린 다음 그는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보다 훨씬 예쁜 애들이 그의 주위에는 널려 있었으니까. 그에게 처녀를 바친 나는 그때부터 헤픈 여자가 되어 아무렇게나 몸을 굴렸고, 내 인생은 엉망이 되어 갔다.

"솜씨가 기막히군. 이런 식으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전 약한 여자예요. 몸밖에 내놓을 게 없어요
실컷 재미 보고 나서 체포하지는 않겠죠
하룻밤 풋사랑도 사랑은 사랑 아닌가요"


그런데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사내를 오늘 호텔 방에서 20여 년 만에 콜걸과 고객 입장으로 만난 것이다. 정년퇴직한 그는 많이 늙어 있었고, 그래도 여자를 안고 싶었던지 돈을 주고 여자를 샀고, 하필이면 그 여자가 바로 나였으니 이런 해괴한 만남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도 운명일까. 결과적으로 그를 죽게 했으니 정말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내 배 위에서 그 짓을 하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심장마비로 죽었다면 당연히 복상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의 죽음은 복상사가 아니다. 내 배 위에 올라간 그가 헐떡거리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는지 손으로 해 달라고 했고, 그래서 핸드플레이를 해 준 것뿐인데 그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그런 죽음을 뭐라고 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가 다급하게 병원을 찾았을 때 나는 설마 하고 그의 요구를 묵살했었는데, 거기에는 은연중에 복수의 감정이 숨어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차갑게 반응했고, 잔인하게 그를 방치했었다. 빨리 손을 썼다면 살아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를 살리기 위해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겁이 나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렇다면 나는 살인자일까? 나에게 살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의 죽음이 참 안됐다거나 안쓰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들고 처치 곤란한 골칫덩이처럼 생각될 뿐이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잔인해졌을까.



4일이 지났지만 그녀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두려움에 움츠러들었던 자신을 보고 바보 같았다고 생각하면서 기분도 풀 겸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생각난 곳이 있어 그곳이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달맞이언덕에 있는 '죄와 벌' 카페로 향했다. 추리소설광인 그녀는 그 카페에 그녀가 좋아하는 추리작가 노준기가 매일같이 죽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서너 번 찾아가서 그의 사인까지 받기는 했지만 감히 마주 앉아 차 한잔할 용기가 없어 지금까지 머뭇거리기만 했는데 오늘은 돈도 두둑하겠다 그에게 와인이라도 한잔 대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 보니 그날따라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포라는 여인에게 그의 행방을 묻자 금방 민감하게 반응한다.

"답답하다고 하면서 해운대 바닷가에 가서 바람이라도 쐐야겠다고 하면서 내려가신 것 같은데…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어요."

나간 지는 한 시간 남짓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즉시 해운대 바닷가로 내려갔다.

석양으로 물든 바닷가는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드넓은 모래밭에도, 호안 도로에도, 식당과 술집에도 온통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노인이 술집에 앉아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술집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목로주점'이라는 이름의 술집 앞 노천에 놓여 있는 긴 나무 탁자 앞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고 어떤 젊은 사내하고 함께 앉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머뭇거리거나 하지 않고 한걸음에 다가가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번에 '죄와 벌'에서 사인해 주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제야 생각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를 했다.

"제가 술값이 좀 생겨서 선생님한테 와인 한잔 사 드리려고 '죄와 벌'에 갔더니 하필이면 안 계시더군요. 해운대에 바람 쐬러 가셨다길래 바닷가를 다 뒤질 생각으로 왔는데 의외로 아주 쉽게 선생님을 찾았어요. 제가 술 한잔 사도 되죠?"

그녀는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벌써 앉아 있었고, 옆에서 젊은 사내가 헤벌쭉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좋고말고요. 선생님은 외로운 분이시니까 술 많이 사 드리세요. 선생님은 참 좋겠습니다. 이런 미녀들이 술 사 주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오니."

곰처럼 미련스럽게 생긴 그 사내는 능글거리면서 그녀의 몸매를 살피는 것이 벌써 그녀한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와인을 한 병 주문하려고 했지만 작가가 이런 데서 파는 와인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서 차라리 사케를 마시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그녀는 웨이터를 불러 사케와 안주를 새로 주문했다. 사케를 차갑게 해서 마시자 곰은 술이 당긴다고 하면서 권하는 족족 마셔 댔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 두 남녀가 호텔에서 몰래 바람을 피웠는데 남자가 너무 흥분해서 복상사를 하면 여자 입장에서는 참 곤란할 것 같아요. 경찰에 신고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고…."

"그런 경우에는 여자 입장을 이해해 줘야지. 여자가 신고하지 않고 도망친다고 해서 너무 단죄할 건 못 돼요."

"여기 숙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빤히 쳐다보며 묻는 말에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가 한 짓을 알고 있기나 한 듯이 던진 질문이었다.

"겁은 나지만…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신고도 안 하고 도망칠 수는 없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당해 보면 그렇게 안 될 걸요."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곰이 이죽거렸다.

"왜 갑자기 복상사 이야기예요? 그런 사건이 있었나요?"

늙은 작가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네, 요 며칠 전에 저쪽 길 건너편에 있는 올리브 호텔에서 투숙객이 죽었는데 60대 남자로, 심장마비로 죽은 걸로 봐서 복상사로 추정됩니다. 여자는 신고도 하지 않고 도망쳤는데 조금 전에 신원이 밝혀졌습니다. 남자의 사타구니와 휴짓조각에서 정액이 많이 검출된 것으로 봐서 여자와 섹스를 한 게 틀림없습니다."

"자위행위 끝에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아닙니다. 복도에 설치된 CCTV에 여자가 방에 출입한 게 찍혔습니다. 하지만 선글라스와 가발로 변장을 하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곰은 여자에게 슬쩍 미소를 보냈다.

"미안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직업이 직업이라서 앉으면 이런 이야기만 합니다."

"아, 아니에요. 재미있는데요 뭐.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뭔가요?"

"형사예요. 강력사건만 전담하고 있는데 낭만적인 데도 있는 형사예요."

하고 작가가 말했다.

"어머, 그러시군요."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재미없는 직업이에요. 인간의 나쁜 면만을 보고 다니니까 인간에 대해서 회의를 느낄 때가 많아요."

"그렇겠군요. 그런데 그 도망갔다는 여자, 어떻게 신원을 알아냈죠?"

"그게 좀 재미있게 됐어요. 여자는 매춘 전과가 있는 콜걸이에요. 그리고 죽은 남자는 조상호라고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꽤 유명한 사람이에요. 신문에도 사망기사가 났었죠. 호텔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심장마비사 같다고만 간단하게 실렸죠."

작가가 손가락을 하나 세워 흔들면서 끼어들었다.

"페미니즘 어쩌고 하면서 그 방면의 권위자로 행세했는데 콜걸을 호텔로 불러 그 짓을 하다가 사망했으니 원, 모두가 가짜투성이야."

"위선자죠. 남자가 죽자 여자는 신원을 감추기 위해 방안에 있는 지문을 모두 지웠어요. 하지만 한 군데 빠진 데가 있었어요. 그게 실수였어요. 바로 남자의 저고리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지갑을 만진 거예요. 돈을 훔치려고 그랬겠죠. 거기에 지문을 잔뜩 묻혀 놓고 그걸 지우는 걸 깜박했어요. 거기만 빼먹은 거예요. 지갑 안에는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만 달랑 들어 있었는데 일부러 그걸 남긴 것 같아요. 몽땅 빼 가기는 좀 뭣하고 하니까 그걸 한 장 남긴 것 같은데…그걸로 봐서 그 안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여자를 만나 보면 얼마를 빼 갔는지 알 수 있겠죠.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쳐다보며 웃고 있는 형사의 얼굴이 마치 저승사자 같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재미있네요."

"세상에는 재미있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의외로 참 많아요."

그녀는 잔에 남아 있는 술을 입속에 털어 넣고 나서 빈 잔을 곰에게 건넸다. 그리고 거기다 술을 따르면서 넌지시 물었다.

"신원을 알아냈으면 왜 빨리 그 여자를 붙잡지 않는 거죠?"

"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까 서두를 거 없어요.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으니까요. 허탕 안 치려면 한밤중에 덮치는 게 제일 확실해요."

그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꼭 끼는 청바지에 가려진 그녀의 엉덩이는 터질 듯 팽팽했고, 좌우로 실룩거리는 그 모습은 너무도 육감적이어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선생님은 복도 많으십니다. 저런 매력적인 여자가 팬이라니."

"그것도 복이라고 해야 하나. 난 괴로워요."

늙은 작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 좀 소개해 주십시오. 제가 사귀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서로 인사 나눴으면 됐지 소개할 게 뭐가 있나요."

"혹시 선생님 애인 아닙니까?"

"애인은 무슨…."

준기는 손사래를 쳤다.

"그럼 제가 사귀어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뭐 알아서 할 일이지. 그런데 남편이 있을걸요."

"혼자 사는 여자 같던데요."

"그래요? 어떻게 그걸 알았나요?"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지던데요."

화장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머뭇거렸다. 그대로 내빼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늙은 작가한테도 결례가 되는 짓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저 곰처럼 생긴 형사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오금이 저려 들어 제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어디 아프세요?"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와 앉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곰이 물었다.

"속이 좀 안 좋아서요."

그녀는 침착해지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불안해지기만 했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그녀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참,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군요. 전 해운대 경찰서에서 심부름하고 있는 주달수라고 합니다. 아직 총각입니다."

그녀는 곰이 내민 명함을 받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까 작가가 말한 대로 해운대 경찰서 형사과 소속 형사가 분명했다.

"전 오몽자라고 해요."

그녀는 본명을 말할 수가 없어 가명을 둘러댔다.

"오몽자라…이름이 근사하네요. 실례지만 직업이…?"

"집에서 놀고 있어요."

"놀고 있는 분 같지가 않은데요."

"그럼 뭐 하는 거 같아요?"

"글쎄요. 하여간 놀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 보이는데요. 바깥양반이 불안하겠어요."

"왜요?"

"부인이 너무 매력적이라 바람 피울까 봐서요."

그녀는 불안한 가운데서도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칭찬을 듣고 보니 얼어붙어 있던 가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곰이 따라주는 술을 숨도 쉬지 않고 꿀컥 삼켰다.

"저 혼자 사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곰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 준기는 웃음이 나왔지만 모른 체하고 딴전을 피웠다.

"난 좀 피곤해서 먼저 가볼 테니까 두 분은 천천히 놀다가 가세요."

두 사람은 펄쩍 뛰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털고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몽자는 몹시 당황하면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곰을 따라 도로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바닷가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와 있었고, 호안 도로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들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불빛에 드러난 수많은 얼굴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고, 밤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목로주점은 빈자리 하나 없이 손님들로 차 있었다. 몽자와 곰이 앉아 있는 장방형의 긴 나무탁자에도 손님들이 세 팀이나 앉아 있었다. 옆자리의 손님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댔기 때문에 그들은 바싹 다가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고, 그 바람에 갑자기 친밀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상대가 권하는 대로 거침없이 술을 마셔 댔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몽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호안 도로를 내려가 바다 쪽으로 모래밭을 가로질러 비틀비틀 걸어갔다. 곰은 잠자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가로등 불빛이 멀어질수록 바다 쪽은 어두워졌고, 어둠 속에서 갑자기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곰이 가까이 다가가자 몽자는 비틀거리면서 그의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많이 취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곰은 아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걸었다. 그 역시 취했지만 여자의 농염한 체취에 더 의식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여자는 더 못 걷겠다는 듯 모래밭에 주저앉았고, 곰이 다가앉자 그의 품에 안기며 허리를 틀었다. 곰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몽자의 두 팔이 그의 목을 감으면서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곰은 거침없이 그녀의 가슴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한 손으로 쥘 수 없을 만큼 큰 젖가슴에 그는 흥분하면서 마구 그것을 주물러 댔다. 그에게 완전히 몸을 내맡긴 그녀는 그의 손이 밑으로 내려오자 두 다리를 벌려 주면서 허리를 다시 한 번 크게 틀었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가라앉자 이윽고 방 안은 깊은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올리브 호텔 9층의 한 방에 누워 있었다.

오랜만에 풍만한 여체를 실컷 유린하고 난 곰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노총각의 한이라도 풀듯 그동안 쌓여 있던 욕정을 한 방울 남김없이 쏟아붓고 난 그는 문득 여자가 만나자마자 이렇게 쉽게 몸을 허락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 버렸다. 품에 안겨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굉장하더군.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난 너무 좋았어요. 꼭 죽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곰의 두 다리 사이를 어루만지면서 꿈꾸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그녀가 너무 소리를 질러 대는 바람에 그는 계속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있어야 했었다.

"저절로 소리가 나오는데 어떡해요."

시간은 자정이 지나고 있었다.

"참, 아까 술 마실 때 오늘 밤 누구 잡으러 갈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거야 뭐 천천히 가도 돼요."

"늦었는데 이제 가 봐야 하잖아요."

"한 번 더 하고 가지."

"안 돼요."

그녀는 발딱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는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독 안에 든 쥐는 어떻게 요리하든 독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떻게 요리할지 궁리하는 것은 수사 형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쳐 덮칠 수도 있고, 점잖게 전화를 걸어 불러낼 수도 있고, 경찰서로 출두하라고 연락할 수도 있다. 그는 전화기에 입력해 놓은 전화번호 명단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아냈다. 손자애. 매춘 전과가 있는 40대 초의 여자로, 이번 사건의 경우 심장마비사한 사내를 방치하고 내뺀 혐의가 있다. 지갑에서 돈까지 훔쳐간 혐의가 있지만 그것은 확실치가 않다. 어떻든 대단한 중죄를 저지른 용의자는 아니다. 그런 용의자를 뭐가 대단하다고 한밤중에 집으로 잡으러 간다는 말인가. 일단 전화를 걸어 신원을 확인한 다음 내일 밖으로 불러내든가 서로 출두하라고 하면 된다. 그는 손자애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몽자는 샤워를 하다 말고 어렴풋이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타월로 몸을 훔치면서 밖으로 나가 핸드백 안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얼른 귀에다 갖다 댔다.

"여보세요?"

"실례지만 손자애 씨입니까?"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이중으로 들려왔다. 순간 그녀는 휴대폰을 귀에다 갖다댄 채 비스듬히 누워 있는 곰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휴대폰을 내리면서 잡아먹을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솜씨가 기막히군. 이런 식으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전 약한 여자예요. 몸밖에 내놓을 게 없어요."

그녀는 창가에 움츠리고 서서 말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실컷 재미 보고 나서 체포하지는 않겠죠. 하룻밤 풋사랑도 사랑은 사랑 아닌가요."

"뭐라고? 나 참 기가 막혀서…."



김성종

소설가



■후원: 부산 해운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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