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전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 구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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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하나로 무대 이끌던 남자, 스크린 앞에 다시 서다

구자범 씨는 '맨 인 블랙'이다. 검은 옷밖에 없다. 독일에서 오페라 지휘 때 단원들에게 하얀 지휘봉이 잘 보이게 하려고 입던 것이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렸다. 통솔에 앞서 배려하는 것이 리더의 덕목임을 이 단출한 패션이 증명한다. 구 씨가 지난 3일 영화의전당 야외상영장에서 옅은 미소를 띠며 근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Scene #1.7월 9일

전 경기필하모닉·광주시향 상임 지휘자. 이 정도 경력이면 대체로 공인으로 보고 이름 뒤에 '씨'를 붙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묵은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미래 개척을 선언했다. 좀 더 자유로운 내일을 위해 그를 구자범(44) 씨라 부르기로 한다.

오는 9일이면 서울 토박이 구 씨가 혈혈단신 부산에 정착한 지 1년이다. 화려한 직함을 내려놓고 근 1년간 '반백수'로 지냈던 그가 요즘 생애 가장 빡빡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일부터 영화의전당으로 출근하고 있는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자막팀에 채용된 4개월짜리 단기 스태프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꼼짝없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하는 그의 업무는 자막 교정. 8월에는 토요일, 9월부터는 휴일도 없이 매일 출근해야 하는 고된 일이다. 한때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합쳐 500여 명을 손 끝 하나로 움직이던 그는 지금 영화 관련 업무가 처음인 팀내 최고령 막내다.

연세대 철학과 졸업 후 독일서 지휘 공부 
광주시향·경기필하모닉 지휘자로 센세이션 

지난해 단원간 갈등 보다 못해 사표 
부산 정착 1년, BIFF 자막팀서 교정 맡아

"명예훼손 고소 항고 접어, 과거 연연 않기로 
영화음악 같은 새로운 길 개척해 나갈 것"

"여러 명이 하는 일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오페라·오케스트라 지휘도 그렇죠.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여느 예술가처럼 올빼미형으로 살아 온 그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제일 힘들다면서도 그 표정은 전혀 찌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설레는 분위기다.

구 씨는 연세대 철학과 졸업 후 음악의 길을 택했다. 그는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해 철학과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철학을 하기 위해' 그 과를 택했고, 졸업 후 답을 얻었다. "관계를 통해 존재들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자신만의 '인생 나침반'을 갖게 된 구 씨는 추상적 관계의 극단을 달리는 음악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기로 한다. 음표의 높이와 길이, 몇 가지 기호만으로 듣는 이의 마음에 수많은 파장을 일으키는 음악이, 그는 어려서부터 좋았다.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 대학원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다름슈타트와 하노버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각각 차석·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나이와 인종이라는 유리벽을 뛰어넘는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오페라 지휘를 하면서 언어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자막 감수를 하기도 했던 경험이 영화 자막 교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자막팀을 택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요즘도 매일 2~3편씩은 영화를 봐요. 전에는 5~6편도 봤죠."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에, 음악에서 갑자기 영화로. 뜬금없는 이 남자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Scene #2.7월 5일

2009년 독일 하노버에서 광주시향으로 날아온 구 씨는 광주항쟁 3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시민합창단 518명과 함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연주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2011년 경기필하모닉으로 자리를 옮겨 이듬해 4월에는 엄숙한 클래식의 틀을 깨는 '만우절 음악회'를 열어 또 한 번 충격을 줬다.

팬카페가 생기고 매진 사례가 잇따랐다. 그는 얼굴과 온몸을 지휘봉으로 사용했다. 깐깐한 연습과 격의 없는 소통을 거쳐 관객 앞에 차려 내놓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 그의 지휘에 맞춰 요동치게 했다.

2013년 봄, 숨가쁘게 내달리던 그의 인생에 시련이 닥친다. 애초 있지도 않았던 성희롱을 한 여성 단원이 진정하고, 진정을 취하한 뒤 단원들 사이에 자신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다 못한 그는 사표를 냈다. 이후 일부 언론에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보도되고, 포털 사이트에서는 부정한 단어와 구 씨를 연관 짓는 검색어 조작까지 이어졌다. 이를테면 '명예살인'이었다.

지난 4월 검색어 조작에 관여한 단원들에게 벌금형이 부과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그가 해당 언론 등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고소 사건 조사는 지지부진했다. 참고인·증인을 불러 제대로 수사하라는 탄원서가 수십 장 제출된 바로 다음 날, 오히려 당국은 피고소인을 기소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며 변호인은 즉각 항고했고, 5일은 항고이유서 제출기한이다. 하지만 구 씨는 항고를 '거부'한다. 포기가 아니다.

"작년 겪은 그 일보다 세월호 참사가 더 저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정말 답답해 울었습니다." 타인의 삶과 명예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사람들, 억울한 호소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당국의 모습이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과 겹쳐져 보였던 게다.

"그들을 용서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미워하진 않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만 있다면 좋겠어요." 이제 그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스스로를 과거에 얽어매 두고 싶지 않아요.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법도 권력의 산물인 탓에 양심과 진실 앞에 때로 누추하다. 구 씨는 이와 다른 길을 가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상처받은 그가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란다. 사회적 약자와 느낌을 나눌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고 싶단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지휘봉은 잡고 싶지 않아요. 영화음악 같은 일은 해 보고 싶어요."

'이 나이 되도록 바다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한다는 구 씨의 지난 1년, 어쩌면 아름다운 바다와 영화를 가진 부산이 찢기고 헤집어진 그의 심신을 조금이나마 보듬어 줬는지 모르겠다. 피아노 레슨만 해도 편히 살 수 있을 그가 쉬운 길을 마다하고 험한 길을 간다. 11월이면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될 그이지만 부산에서 그에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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