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달맞이언덕의 안개] 26. 아, 달맞이언덕의 안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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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원전이 폭발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어느 날 해운대 바닷가에 앉아 있는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낮게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더니 느닷없이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노준기 씨! 소설가 노준기 씨! 거기 계시면 안 됩니다! 빨리 나오세요! 30㎞ 밖으로 나오세요!"

나는 깜짝 놀라 헬기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그녀가 나와 함께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내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당신을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죄악이야. 여기서 빠져나갑시다"

내 주위에는 개들이 몰려와 있었다. 내가 틈틈이 먹이를 주자 놈들은 항상 나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그 수가 점점 불어나 지금은 50마리쯤 되는 것 같았다. 고양이들도 있었지만 놈들은 개들 때문에 내 곁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나는 카페 '죄와 벌'의 테라스를 고양이 식당으로 만들었다. 그곳은 주위로 철제 빔이 설치되어 있는 데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개들의 접근을 차단할 수가 있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조달할 수가 있었다. 나는 대형 마트 한 곳을 정해 놓고 그곳에서 주로 먹을 것들을 약탈했다. 소규모 마트로부터 중대형에 이르기까지 널려 있는 것이 마트였고, 그 안에는 아직 먹을 것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골라 가면서 약탈할 수가 있었다. 이 경우 사실 약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두면 버려진 쓰레기나 다름없고 시간이 흐르면 모두 썩어 버릴 것들이었다.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오지 않을 텐데 과연 누구를 위해 먹을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인가. 내가 살아 있는 한 마트는 차례대로 정리해 나갈 생각이었다.

"소설가 노준기 씨! 빨리 차를 타고 경계선 밖으로 나가세요! 당신은 지금 방사능 오염지역에 있습니다! 생명이 매우 위험합니다! 거기 계시면 안 됩니다! 빨리 부산을 떠나세요! 거기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추적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나는 캠핑카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켜 보았다. 화면에는 공중에서 내려다본 원전 폭발 현장과 30㎞ 이내의 방사능 오염지역이 생생히 비치고 있었다. 기자가 헬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중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면서 캠핑카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고, 천천히 굴러가고 있는 그 차를 카메라가 뒤쫓고 있었다. 그 차 뒤를 수십 마리의 개들이 따라가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그것이 내 캠핑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화면을 응시했다. 세상과 완전히 등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카메라는 내 차의 번호판을 크게 확대해서 보여 주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신분이 어떻게 해서 노출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바닷가에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내 모습은 후줄근해 보였고, 거기다 허리까지 구부정했고, 다리도 절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둔 병든 노인의 모습,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그냥 죽으나 방사능에 오염되어 죽으나 조만간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기자는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지껄여 댔다.

"차 번호를 조회한 결과 차 주인은 놀랍게도 유명한 추리작가인 노준기 씨로 밝혀졌습니다. 작가 노준기 씨가 무슨 이유로 방사능 오염지역에 남아 있는지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노준기 씨가 방사능 피폭을 감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인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습니다. 경찰은 노준기 씨가 오염 지역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노준기 씨를 강제구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방사능 피폭 위험 때문에 구조 요원들이 오염지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몹시 꺼리고 있다고 합니다. 평생 동안 추리소설만 써 왔고 지금까지 100여 편 가까운 추리소설을 발표한 노준기 씨는 추리작가답게 기행을 일삼아 왔다고 합니다. 만일 이번 일도 기행의 하나라면 기행치고는 너무도 위험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준기 씨의 기행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흰 가운을 입은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화면 아래쪽에는 S대 의대 정신과 교수라는 직함이 보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사람은 갑자기 공황상태에 빠져들면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돼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경우를 겪게 됩니다. 노준기 씨도 그런 케이스 같은데, 그 정도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그분은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습니다. 개들한테 먹이까지 주면서 유유자적하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을 피해 사고 현장으로부터 될수록 멀리 가려고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는 판에 그분은 반대로 그 위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겁니다."

"노준기 씨는 평소에도 기행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혹시 지금의 행동도 기행이 아닐까요?"

"목숨을 담보로 한 기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행이 아니라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판단능력 상실에서 온 행동입니다."

"노준기 씨는 현재 70이 넘은 고령이신데…. 판단능력 상실과 알츠하이머병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기자는 의사의 답변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치매에 걸린 게 아니냐고 묻고 있었다.

"판단능력 상실은 바로 알츠하이머병과 직결되는 증상입니다. 그 병에 걸리면 누구나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기억력도 떨어지게 되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노준기 씨가 자진해서 재난 지역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희박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자기 발로 걸어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경찰이 하루빨리 구조를 해야겠군요.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작가 노준기 씨의 모습은 국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노준기 씨가 이성을 되찾아 하루빨리 재난 지역에서 탈출하기를 온 국민은 바라고 있습니다."

망할 자식들 같으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문제를 참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환멸이 느껴졌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를 귀에다 갖다 대기 무섭게 곰 형사의 굵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선생님! 방금 방송을 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괜히들 시끄럽게 구네요."

"아니, 어쩌자고 거기 계신 겁니까? 선생님 지금 제정신입니까?"

그는 나의 어리석음에 대해 심하게 질책했다. 하지만 나는 달맞이언덕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해 주었다. 그는 어이없어하다가 방송에서 나를 치매 환자 취급을 한 것에 대해 몹시 분개했다.

"오해를 살 만하지. 난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선생님, 이렇게 헤어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선생님, 술 한잔 하게 밖으로 나오십시오. 술 한잔 하시고 나서 돌아가고 싶으면 다시 돌아가십시오. 그때는 막지 않겠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여전히 하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수용되어 있다고 하면서 울었다.

"선생님한테 가고 싶어요. 여기에 더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아요. 자살 충동까지 느끼고 있어요. 차라리 선생님 곁에서 함께 지내다가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인간의 존엄성이 이렇게 파괴되어도 되는 것인지 전 지금 심한 절망감에 빠져 있어요. 선생님이 개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모습은 환상적이었어요. 죽음의 환영을 보는 것 같았어요. 안개 속에서 뛰어다니는 개들을 보니까 달맞이언덕이 그리워요. 달맞이언덕의 안개 속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그곳의 안개를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미치게 보고 싶어요. 차라리 저도 선생님처럼 방사능 같은 거 무시해 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기에 오면 안 돼요.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 수 있는데 왜 그걸 포기하려고 해요? 그러지 말고 프랑스로 돌아가요. 영주권도 있으니까 프랑스로 돌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잖아요."

"싫어요! 선생님을 거기에 혼자 두고 어떻게 저만 살겠다고 떠날 수 있어요? 그러지 말고 저하고 함께 프랑스로 가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프로방스에 정착해서 농사짓고 살아요. 예쁜 카페도 하면서 살아요. 전 얼마든지 잘할 수 있어요."

"포,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방사능에 이미 노출돼서 오래 살 수가 없어요. 내가 죽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렇게 알아요. 프랑스에 함께 간다는 건 짐만 될 뿐이에요. 난 살 만큼 살았으니까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어요. 벌레처럼 생명만 더 연장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난 지금 외롭긴 하지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산다는 것….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고 아무나 겪을 수 없는 경험이에요."

"아, 바보 같은 선생님…."

포와 통화를 끝내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 왔다. 경찰에서도 전화가 걸려 오고, 나와 친분이 있는 문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일일이 응대할 수가 없어 나는 전화기를 아예 꺼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원전 폭발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텔레비전을 켜자 화면을 장식한 것은 북한군이 이른 새벽에 기습적으로 서해 5도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보도였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사태였다. 남한이 원전 사태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백령도, 연평도, 대청도, 소청도, 우도 등 5개 도서를 공격해 온 것이었다. 적의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게 물리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국군의 방어벽은 일격에 허망하게 무너졌고, 5개 도서에는 어느새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달아 치명적인 사태를 맞은 남한은 대혼란에 빠져들었고,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군인들을 잔뜩 태운 트럭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는 장면을 배경으로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북한의 공격을 비난하면서 즉시 5개 도서에서 북한군이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와 함께 국군은 조만간 5개 도서를 탈환할 것이므로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대탈출은 시작되고 있었다.

반격을 가할 경우 전면전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한 남한 정부는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엄포만 놓고 있었고, 그 사이에 남한 사회는 완전히 통제 불능의 혼란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돈을 빼 가는 바람에 은행 업무는 마비 상태가 되었고, 생필품이 동나면서 물가가 하루아침에 폭등했다. 재벌들은 제일 먼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서둘러 한국을 떠났고, 외국에 집을 사 둔 부자들도 짐을 싸 들고 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중 국적을 가졌거나 외국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도 가족들을 데리고 공항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외국행 항공권은 순식간에 동나고 말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발을 구르면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 것을 생각하면서 밤잠을 설쳤다.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경우 북한군의 사정권에 들어 있는 남한은 전역이 불바다가 될 것이 보지 않아도 뻔하다. 국민들은 살기 위해 피난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디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가 문제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머지 99.99%는 어디로 갈 것인가? 피난을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면 하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디론가 가야 한다. 모든 공항은 폐쇄되었고 뱃길도 끊기고 말았다. 어찌어찌해서 조그만 낚싯배에 무작정 수십 명이 올라탄다고 한들 거친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떠도는 보트피플 신세를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5개 도서를 빼앗기고도 확전을 두려워한 한국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궁지에 몰려 있다가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마침내 며칠이 지나 반격을 가했다. 평소 줏대가 없어 물통이라는 별명이 붙은 대통령은 모처럼 과감히 결단을 내려 반격을 가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체면을 잠시나마 세워 보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반격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지상군 투입은 삼가고 함정과 해안 포대를 동원해서 5개 도서에 포탄을 퍼부었다. 그에 맞서 북한군도 함정과 해안 포대를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그러다가 북한의 미사일 한 발이 서울 강남까지 날아와 떨어졌다. 그것은 확전을 예고한 것으로 다분히 서울 시민의 심리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날려 보낸 것이었다. 미사일은 하필이면 전국에서도 제일 비싼 60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건물을 파괴했고, 그 바람에 거기에 거주하는 주민 1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한밤중에 주민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 미사일이 날아왔으면 아마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 미사일 한 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지 아파트 건물 한 동을 파괴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서울 시민들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는 그 결정적인 위협에 서울 시민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휩싸였고, 무시무시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허둥지둥 피난길에 올랐다. 그 바람에 서울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남쪽으로 향한 피난 대열이 일시에 몰려드는 바람에 한강 다리들은 마비가 되었고, 고속도로는 사람들과 차들이 뒤엉켜 거대한 탈출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다 비까지 퍼부어 대고 있었고, 맞은편 도로 위로는 장갑차와 탱크들, 그리고 무장 군인들을 잔뜩 태운 트럭들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참담함과 공포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확전으로 치달을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중재에 나선 것은 미국과 중국이었다. 전면전으로 번질 경우 미국과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고, 한반도는 세계 최강의 두 군사력이 충돌하는 3차 대전의 격전지로 변할 것이 뻔했다. 이미 서해에는 중국 항공모함과 미국 항공모함이 대기하고 있었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오키나와의 미군은 출동 태세를 갖춘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자위대도 2차 대전 후 최초의 참전이 될지도 모르는 전쟁을 앞에 두고 초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북한이 서해 5개 도서를 기습적으로 점령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서해안을 흔들던 포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제2의 한국 전쟁은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지만 피난 행렬은 쉽게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울은 텅 비어 버렸고,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지역인가를 몸소 겪어 본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서울에 가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서울의 부동산값은 폭락했고, 대신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제주도 집값이 폭등했다. 부산과 울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도 방사능 오염 지역이라는 이유로 기피의 대상이었다. 한국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국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피폐해지고 거칠어진 생활은 비인간적인 사회 현상으로 나타났고, 결국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렵고 희망도 없는 나라로 추락할 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원전 폭발로 인한 방사능 오염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것은 방송에도 나오지 않았고, 자연 나라는 존재도 잊혀 갔다. 더 이상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고,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나에게 피난민 행렬 같은 것은 남의 나라 얘기였다. 사람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고, 그런데도 개들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포한테서도 연락이 없었다. 나는 궁금했지만 서로 잊고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나았기 때문에 그녀에 관한 생각을 될수록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달맞이언덕의 안개만은 여전했다. 나는 그 변함없는 안개의 모습이 좋았다. '죄와 벌' 테라스에 앉아 고양이들한테 먹이를 주고 나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놀라서 안개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사람을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포는 나를 발견하자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다가왔는데 옆으로 자전거를 끌면서 오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전거를 버리고 테라스로 올라온 그녀는 내 앞에 바싹 다가서더니 허리에 두 손을 걸치면서 거만하게 말했다.

"이제 증명이 됐나요? 제가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 증명이 됐나요?"

그녀는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얼굴은 새카맣게 타 있었고, 입고 있는 옷들은 때에 절어 있었다.

"뭐하러 왔어요?"

"뭐하러 오다니요? 자전거 타고 여기까지 오는 데 사흘이 걸렸어요. 찻길은 모두 봉쇄되어 있어서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서 몰래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내가 두 팔을 벌리자 그녀는 내 품속으로 뛰어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온 그녀한테 나는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커피를 끓여 주었다.

"밖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에요. 전라도 지방은 지금 생지옥이에요. 죽을 바에는 여기서 죽는 게 훨씬 나아요."

그녀가 나와 함께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내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방사능 오염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그녀가 내 곁에서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았고, 그것을 더 이상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생각 끝에 나는 할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나가 캠핑카에 태웠다.

"자, 갑시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당신을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죄악이야. 여기서 빠져나갑시다."

"정말이에요?"

"이제부터 전국을 유람이나 하면서 삽시다."

"아, 정말이에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출발하기 전에 우리는 차에서 내려 마지막으로 달맞이언덕의 안개를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될 안개한테 나는 긴긴 키스를 보냈다.

차를 몰고 언덕을 내려가면서 보니 안개는 작별을 아쉬워하는 듯 갑자기 미친 듯 춤을 추고 있었다. 차 뒤로는 수십 마리의 개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 달맞이언덕의 안개여! 안개여!



김성종

소설가


■후원: 부산 해운대구

연작 단편소설 '김성종의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26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다음 주부터는 연작 단편소설Ⅱ '김성종의 해운대, 그 태양과 모래'가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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