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학림의 예술과 사랑] 24. 김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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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김영한(1916~1999·사진)이었다. 가장 나중까지 남은 이름은 김자야다. 김자야라는 이름은 '모던 보이' 시인 백석이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와 지어 준 이름이었다. 전장에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자야, 백석의 나타샤가 김자야였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를 나는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응앙응앙, 푹푹 빠지는 그 좋은 밤이 백석의 사랑하는 나타샤, 김자야였다.

김자야가 함흥 영생여고보 26세의 영어 교사 백석을 만난 것은 22세 때. 함흥권번에서였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 16세 때 기생이 된 김자야는 문재(文才)를 지닌 인텔리 기생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 김자야는 유학을 주선해 준 조선어학회의 신윤국이 함흥에서 일제의 옥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함흥으로 귀국했다. 거기서 그이 대신 백석을 만난 것이다. 교사들과 권번을 찾은 백석은 첫눈에 자야를 와락 품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그게 거짓말 같은 백석의 대사였다. 백석은 함흥의 바닷가를 다녀온 뒤 "당신을 위해 썼다"며 자야에게 시를 건넨다. '바닷가에 왔더니/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시인 백석의 아름다운 나의 나타샤
3년밖에 못 살았던 일평생의 사랑


둘은 서울 청진동과 명륜동을 전전하며 듬성듬성 끊어지는 3년간, 범인의 평생보다 더 긴 신혼살림을 살았다. 백석은 집안의 강권으로 3번의 억지 결혼을 하지만 첫날밤도 보내지 않고 자야를 찾는다.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1939년 백석은 만주로 가 세상을 버리면서 둘은 영영 헤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아니 끝이 아니었다. 1987년 '백석 시선집'이 남한에서 나오자 김자야가 세상에 나왔다. 매년 7월 1일 백석의 생일날이면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지냈다고 했다. 법정 스님에게 1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기부했으며, 창비 출판사에는 2억 원을 기부해 그리던 그 이름의 백석문학상이 만들어졌다.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요."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theos@busan.com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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