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사고 전말 재구성] 과적… 위험… 불안… 무시… 침몰…도주… 발뺌… 무능… 오열…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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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침몰한 세월호의 바닷물에 잠기지 않은 선수 부분에서 해경과 군당국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김경현 기자 view@

세월호 참사 13일째에 접어들면서 사건의 실체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허술했던 선박 관리, 무책임한 선원, 무능했던 구조 작업 등 수많은 악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참사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금까지 드러난 검경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결과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건 이 중 하나만 정상적으로 작동했어도 참사는 면했을 것이란 가정이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의 희망은 절망으로 절망은 분노로 변해갔다.


① 18년 된 낡은 선박 도입, 무리한 증축

참사의 씨앗은 2009년 1월 잉태됐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여객선사의 선령제한을 기존 25년에서 30년까지 완화했다. 기업 비용이 연간 200억 원가량 절감된다는 게 이유였다.

여객선 사용기한이 연장된 뒤 2012년 10월 청해진해운은 일본에서 18년 된 노령선박을 들여왔다. 일본에선 퇴물 배인지만 규제 완화로 한국에선 10여 년은 더 운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낡은 배를 들여오면 안전조치가 강화돼야 한다. 하지만 세월호는 반대였다. 손님과 화물을 더 싣기 위해 4~5층을 증축했던 것. 배 옆면에 설치된 무게 50t가량의 차량 및 화물 통로인 '램프웨이'도 철거했다.

그 결과 정원은 애초 840명에서 956명으로, 배의 무게는 6천586t에서 6천825t으로 늘었다. 5층엔 사진작가 '아해'로 알려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진 갤러리도 들어섰다. 결국 세월호는 '수직증축'으로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가면서 위험한 배가 됐지만, 소유주의 취미활동 공간 마련 및 수익성 확보엔 성공한 셈이다.




② 규정 화물 적재량 3배, 상습 과적 화물선?

한국선급은 지난해 1월 세월호 복원성 검사를 하면서 조건부 통과를 내줬다. 선박 개조로 무게가 늘어난 만큼 화물과 여객의 무게를 기존의 2천525t에서 1천70t으로 줄이라고 했던 것.

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배 밑바닥에 채우는 평형수는 종전 307t에서 1천700t으로 5배 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은 사고 직후 세월호엔 승용차 124대, 화물차 56대 및 컨테이너 등 잡화 1천157t을 합쳐 모두 3천608t의 화물이 실렸다고 밝혔다. 한국선급이 권고한 적재량의 3배 가까운 화물이 실렸던 것. 또 출항보고서에 없던 컨테이너가 CCTV 화면에 포착됐고 차량은 한도보다 30대를 초과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그럼에도 세월호는 과적 여부 검사를 통과했다. 이 때문에 세월호가 전체 중량을 맞추기 위해 평형수를 충분히 넣지 않았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과적 선박이 평형수마저 제대로 채우지 않았다면 배가 기울었을 때 오뚝이처럼 균형을 잡아 주는 '복원력'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③ "배가 종종 기울었다" 무시된 이상징후

세월호의 이상 징후는 침몰 전부터 나타났다. 세월호에 탔던 승무원들은 배가 운항 중 종종 기울었다고 증언했다. 사고 일주일 전까지 세월호에 근무했던 기관사 A 씨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세월호에 오래 있으려고 해도 찜찜했다. 항해하면서 배가 자꾸 기울었고 10도씩 넘어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때 휴가를 떠났던 신 모 선장의 부인은 "남편이 세월호 개조 후 운항을 꺼릴 정도로 불안해했다"고 털어놓았다.

건조된 지 20년이 된 세월호는 고장과 수리도 잦았다. 지난 1일 청해진해운이 작성한 수리신청서에 조타기 전원에 이상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두 달 전 수리신청서에는 엔진 RPM(분당 회전수) 이상이 지적됐으며, 직통 전화기와 레이더 이상으로 부품이 교체됐다.

지난 2월 해경 등의 특별 점검에서는 침수될 때 물을 차단하는 수밀문과 객실 내 방화문 등 5개 항목에서 '불량' 판정을 받았다. 승무원들의 안전 교육도 허술했다. 청해진해운이 지난해 '연수비'로 사용한 액수는 불과 54만 1천 원이었다.



④ 조타실 비운 선장, 3등 항해사가 지휘

맹수처럼 거칠고 사납다는 의미의 맹골수로는 40년간 인근에서 조업해 온 어민들도 조류를 예측할 수 없어 신중을 기하는 곳이다. 세월호가 이렇게 까다롭고 위험한 곳을 지날 때 선장 이준석 씨는 조타실에 없었다. 이후 검찰 조사에서 이 씨는 담배를 피우러 잠시 나갔다고 진술했다. 선원들은 이 씨가 최대 12시간까지 조타실을 비웠다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이 씨를 대신해 조타실에서 조타수에게 키를 돌리라고 지휘한 사람은 입사 4개월의 3등 항해사 박 모(25·여) 씨. 박 씨는 사고 당일 처음 맹골수로 운항을 했다. 사고 당시 조타수였던 조 모(56) 씨도 여객선 운항이 처음이었다.

오전 8시 44분 박 씨는 조 씨에게 키를 5도 돌리라고 명령했다. 오전 8시 49분, 세월호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면서 45도 급변침했다. 중심을 잃고 기울기 시작한 세월호는 엔진이 멈춘 채 조류에 휩쓸려 북쪽으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10시 8분, 세월호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3㎞ 해상에서 바닥을 하늘을 향해 드러낸 채 물에 잠겼다.



⑤ 우왕좌왕 사고 신고 "골든타임 놓쳤다"

세월호의 첫 신고는 16일 오전 8시 55분 사고현장에서 가까운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 VTS로 됐다. 제주VTS에서 연락을 받아 진도VTS에서 세월호로 연락이 갔지만 이마저도 엉망이었다.

진도VTS와 연결된 시간은 오전 9시 7분이었다. 소중한 12분을 아무런 소득 없이 날려먹은 셈이다. 이후 30여 분간 세월호와 진도VTS는 교신을 했다. 하지만 진도VTS에서는 선장에게 모든 책임을 미뤘고, 세월호는 제대로 된 상황 설명 없이 해경의 대응만 물을 뿐이었다.

1등 항해사가 진도 VTS와 통화를 하는 사이 선장은 선박회사와 통화 중이었다. 선장은 회사에 침몰 상황을 알렸지만 선박회사의 퇴선 명령은 없었다.

사고 신고 자체도 늦었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단원고 학생 최덕하 군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오전 8시 52분에 전남소방본부에 가장 먼저 신고했다. 하지만 소방본부를 통해 해경과 연결됐지만 해경은 학생에게 위도와 경도를 묻는 등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지난 16일 침몰한 세월호 조타실에서 선원들이 해양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비교적 손쉽게 탈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⑥ 승객 버리고 탈출, 무개념 선장과 선원

선장 이 모(69) 씨는 배가 기울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조타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8시 58분 이 씨는 선사인 청해진 해운에 배가 기운다는 사실을 보고한 뒤 선사와 대책을 논의했다.

5층 조타실과 1층 기관실의 승무원들은 3층 기관부 선실로 이동했다. 5층 조타실에 있던 기관장 박 모(54) 씨, 배를 몰았던 3등 항해사 박 모(26·여) 씨 등 기관사와 조타수, 조기장, 조기수 등 선박직 선원 7명이 복도에 모였다. 이 때 이들은 승무원만 아는 비밀 통로를 이용했다.

이들의 바로 옆에는 객실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문을 열고 승객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퇴선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30분을 이들은 승객 대피 대신 승무원 제복을 벗고 옷을 갈아 입는데 썼다.

9시 37분, 배가 60도 이상 기울자 선장 이 씨는 퇴선 명령을 내렸고, 승무원 7명은 갑판으로 나와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구조정에 탔다. 나머지 승무원 8명도 이후 도착한 구조정에 올라탔다. 아직 배에는 많은 승객들이 남아 있었다.



⑦ 위기의 순간, 아비규환 속 살신성인 이어져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객실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오전 9시 37분 이미 선장 등 승무원은 모두 배를 탈출한 뒤였고, 승객들은 퇴선 명령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구명조끼만 입고 선내에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놀란 승객들은 서둘러 탈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월호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고 박지영 씨는 끝까지 남아 승객들의 퇴선을 도왔다. 구명조끼를 입지 못한 승객들을 찾아 조끼를 나눠줬지만 정작 자신의 조끼는 없었다. 단원고 고 정차웅 군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학생들을 챙긴 단원고 고 남윤철 교사도 있었다. 그는 최초로 침몰 신고한 고 최덕하 군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다. 최 군은 남 교사를 무척이나 따랐다고 한다. 단원고 고 최혜정 교사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SNS를 통해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며 끝까지 학생들을 안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⑧ 부실한 재난대응 체계… 추가 생존자 '0'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부실한 재난대응 체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사고 현황에 대한 오판은 참사가 발생한 당일부터 시작됐다. 16일 오전 11시 9분과 11시 25분 등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교육청이 "단원고 학생 325명 전원 구조",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해경 공식 발표"라는 문자 메세지를 학부모들에게 발송했지만 뒤늦게 잘못된 발표인 것으로 드러나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같은 날 오후 2시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탑승자 466명 중 현재까지 368명이 구조됐고 2명이 숨졌다"고 공식 집계했다. 하지만 1시간 만에 해양경찰청이 집계에 오류가 있다고 밝히면서 중대본 측은 "탑승자 459명 중 164명이 구조됐고 2명이 숨졌으며 293명이 실종됐다"고 당초 발표를 번복했다. 정부 각 부처간에 혼선이 빚어지자 결국 정홍원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가 17일 꾸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진도체육관을 방문해 실종자 가족들에게 구조작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고 발생 13일째 추가 생존자를 단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하고 있다.

 

⑨ 오류투성이 시신 확인, 유족 두 번 울려

23일 오후 2시 당초 장 모(17) 군으로 파악된 시신의 신원이 갑자기 정 모(17) 군으로 확인됐다는 소식이 해경에서 들렸다.

장 군의 시신과 유족 간의 DNA 대조 결과 '불일치' 판정이 나온 사실에 장 씨의 유족들은 뼈아픈 상처를 받아야 했다.

이 시신은 23일 오전 5시 45분께 진도 해상에서 발견된 뒤 하루 뒤인 24일 수원시연화장에서 화장을 앞둔 상태였다.

정부의 부실한 시신확인 절차 탓에 두 학생의 유족들은 가슴 속에 아들을 다시 묻어야만 했다.

이외에도 두 명의 시신이 DNA 확인 절차에서 신원이 바뀌기를 거듭했다.

신원 확인 절차의 혼란 속에서도 정부는 유가족들에게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해 큰 반발을 샀다.

유족들의 강한 항의에 정부는 시신을 유족들에게 가인도한 뒤 DNA 검사 결과를 통보하기로 정책을 바꿨지만 여전히 팽목항과 병원 등에서는 큰 혼란이 거듭되고 있다.

 

지난 22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가족대책본부에 게시된 수습된 시신의 신원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⑩ 더딘 구조 작업, 가족들 '오열과 분노'

사건 발생 당시 구조 당국의 초기 대응이 늦어지면서 많은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인 72시간을 고스란히 허비해 온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특히 해경이 18일 오전 세월호에 공기를 주입한지 약 1시간 후 선박이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소식을 접한 팽목항의 실종자 가족들은 극도의 절망감에 바닥에 쓰러져 오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내에 에어포켓이 남아있을 확률은 희박해지면서 좌절감을 더했다.

활발한 구조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되던 소조기(지난 23~24일)에도 수습된 시신이 얼마되지 않자 가족들의 가슴이 타들어 갔다. 끝내 추가 생존자 구조 소식이 들리지 않자 격앙된 실종자 가족들은 지난 25일 오후 5시께 팽목항을 찾은 이주영 해수부 장관과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을 강제로 바닥에 앉히고 약 8시간 뒤인 다음날 오전 1시까지 마라톤 회의에 들어갔다.

기상상황은 다시 악화되고 갈수록 구조작업은 더 어려워지면서 가족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김현아·박진숙·김한수·장병진 기자 srdfish@busan.com




['유병언 전 회장 청해진해운 실소유주' 관련 반론보도문]

본 인터넷신문은 지난 4월 28일자 사회면 「유병언 일가 '유령회사' 압수수색, 160억 외화 밀반출 확인」, 4월 24일자 「국내 모든 연안 여객 선사 금감원 '부실대출' 긴급점검」, 4월 28일자 「과적...위험...불안...무시...침몰...도주...발뺌...무능...오열...분노...」, 5월 1일자 「해경 정보수사국장 세모그룹 7년 근무」, 「이용욱 해경 국장 경질 "세모그룹 경력, 구원파 신자 논란에 결국..."」 제하의 기사에서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 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병언 전 회장 측은 "유병언 전 회장은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주식을 전혀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실소유주가 아니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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