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 전북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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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봄 머금은 청보리 '초록의 함성' 들리나요

전북 고창 청보리밭을 걸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누리는 것이었다. 눈앞으로 끝도 없이 펼쳐지는 청보리의 싱그러운 연둣빛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엔 청보리밭만 보고 돌아오려고 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선운사 동백을 볼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여행이라는 게 무엇을 꼭 많이 봐야 하는 건 아닌 만큼 그 두 가지만이라도 멀리까지 갈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고창이 가진 자산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1박 2일을 머물렀다.

고창을 다녀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그새 학원관광농원 청보리 이삭은 90% 이상 패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단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든 고창읍성 성곽 길 철쭉은 다홍빛을 뽐내며 만개했다. 또 람사르협약에 가입된 '오베이골 운곡습지'의 신록은 나날이 연둣빛을 더해 가는 중이었다. 다만, 선운사 동백은 '진다'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시들지 않은 꽃떨기 그대로 뚝뚝 떨어진 모습이 계속 떠올라 '잔인한 4월'이 되고 있다. 초록과 붉은빛이 어우러진 고창의 '색(色)'다른 봄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초록 세상, 청보리밭의 추억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전북 고창군 학원농장 진영호(66·1992년 귀농) 대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농업도 경관이 될 거라는 사실에 대해선 미처 인식하지 못 했다. 진 대표 소유의 50만㎡(15만 평)에다가 공음면 일대 청보리작목반에서 경작 중인 15만여 평이 더해져 총 100만㎡(30만 평) 규모에 심어놓은 청보리는 그야말로 일대 장관이었다.

'S'자로 고부라진 흙길 한마디로 예술
꽃보다 아름다운 초록 속으로 걸음걸음

나날이 연둣빛 더해가는 운곡습지
지천으로 깔린 야생화·나무 보는 즐거움 

고창읍성 1.7㎞ 성곽길 철쭉의 향연
선운사 동백나무 저마다 붉은 꽃 토해 내


"전국의 보리밭 중에는 우리보다 더 큰 곳도 있어요. 하지만 이곳이 가장 예쁜 보리밭일 겁니다. 여기는 느릿한 선으로 낮게 이루어진 구릉이 있고, 구릉 너머에도 보리밭, 거길 지나가면 또 보리밭…. 보리 종류도 예쁘라고 일부러 보리차용으로 심었어요."

하지만 보리 농사 수익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30만 평 농사를 지어 봐야 겨우 1만 가마가 생산될 뿐이란다. 금액으로 따지자면 3억 원 정도. 이걸 30명이 나눈다고 가정하면 1천만 원꼴로 돌아간다. 이 중 절반은 비용 처리하고, 나머지 500만 원은 아껴 써도 두어 달이면 바닥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축제의 생산성은 달랐다.

"뼈빠지게 농사 지어 봐야 연간 매출이 3억 원인데 한 달 축제를 하고 나면 8억 원 매출이 나와요. 올해는 상황이 좀 다르겠지만 예년의 경우, 청보리밭 축제 때 50만 명이 다녀갔어요."

물론, 농업관광이 쉬운 건 아니다. 복숭아밭이든 배밭이든 예쁜 기간이 너무 짧은 게 흠이다. 그래서 청보리밭 이후로 개발한 게 메밀밭이었고, 해바라기밭이었다. 이에 더해 고창 청보리밭 축제는 관 주도가 아닌 자생적인 축제라는 점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보리밭은 원래 이 시기가 되면 구경꾼이 많이 와요. 2000년대 들어선 많이 오는 정도가 아니라 폭발적으로 늘어났죠. 손님이 너무 많다 보니 뒤늦게 관에서 나서서 교통도 뚫어 주고 하다가 이럴 바에야 아예 축제를 하자고 나선 게 지금에 이르렀어요."

청보리밭은 보기에만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진 대표는 보리밭 사이로 너비 2m 남짓한 흙길을 냈다. 'S'자로 고부라진 길들은 한마디로 예술이다. 그리고 이 길은 2㎞ 정도 이어진다. 특별한 동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가면 된다. 어디선가 '보리밭 사잇길로' 노래가 들려오고, 누군가는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기 시작했다.


■보리밭을 걷고 가 보면 좋을 고창 여행지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이 시기, 전북 고창을 기억하는 방법 중에는 '청보리밭과 그 밖의 것들'로 감히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사진은 성곽 길이 아주 예쁜 고창읍성. 일부 고창군청 제공
'모양성'이라고도 부르는 고창읍성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손꼽는 조선시대 읍성이다. 약 1.7㎞에 이르는 성곽 길 옆으로는 철쭉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 길은 돌을 머리에 이고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성 안쪽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대숲 '맹종죽림'도 걸어서 돌아보았다. 최근엔 경관조명까지 갖춰 늦은 시간까지 이용 가능했다. 

선운사와 동백. 일부 고창군청 제공
다음 날 아침 일찍 천년고찰 선운사로 향했다. 동박새의 지저귐만이 유난히 조용한 산사의 정적을 깼다. 대웅전(보물 290) 뒤편으로 수령 500년이 넘은, 3천 그루가 넘는다는 동백나무가 저마다 붉은 꽃을 토해 냈다. 예년 같으면 4월 말이 되어야 절정이라지만 올해는 붉은 동백이 이미 반 이상 땅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나무 아래 흙이 붉은 핏빛을 연상시킬 정도로 슬펐지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선운사를 뒤로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전봉준 장군 생가터(고창군 고창읍 당촌길 41-8)에 들렀다가 고인돌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 1층에선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념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전(5월 31일까지)이 한창이었다. '선운사 마애불 비결사건'을 비롯, '무장기포' '우금치전투' 등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여 주는 전시였다.

박물관을 나와 고인돌유적지로 가기 위해 '모로모로 탐방열차'(오전 10시 30분~오후 5시30분 1시간 간격 운행·1~5코스 왕복, 6코스는 별도 관람·어른 1천 원 등)를 탔다. 고창고인돌유적은 강화·화순과 함께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매산리 산기슭에서부터 약 1.5㎞ 구간에 447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등 단일 구역으로는 가장 큰 군집을 이루고,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지상석곽식 등 양식도 다양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부를 만하다. 

'오베이골 운곡습지'. 일부 고창군청 제공
모로모로 열차가 서는 3코스엔 운곡습지탐방안내소가 있다. 2명의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는 이곳은 사전예약제로 해설을 해 준다. 화학교사 출신의 김동식 해설사와 함께 생태습지인 오베이골 운곡습지, 운곡 저수지까지 걸었다. 이 길은 '질마재 따라 100리길' 제1코스로 '고인돌길'(7.9㎞)의 절반에 해당됐다.

운곡습지는 우포늪과는 달리 페농경지가 산지습지 원형으로 복원되는 중이어서 자칫 심심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광대나물, 제비꽃, 현호색, 쇠별꽃, 양지꽃, 개구리발톱, 산자고 등 지천으로 깔린 야생화와 나무와 곤충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운곡습지를 돌아 나오는데 김 해설사가 말했다. "5월 중순께면 습지에선 솜방망이도 피어날 건데 정말 환상적이에요. 신록도 절정일 테고요. 꼭 다시 오세요. 솜방망이 피면 꼭 연락 드리리다."

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TIP

■교통편과 주요 전화번호(063)


부산에서 고창은 남해 및 호남고속도로를 경유, 고창담양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고창IC나 남고창IC로 내려오면 된다. 최종 목적지에 따라서 3시간 30분~4시간 소요. 고속버스를 이용할 경우, 전주나 광주를 경유해 고창까지 시외버스로 이동한다. 광주~고창은 40분, 전주~고창은 1시간 10분 소요.

고창군 문화관광과 560-2456, 고창읍성 560-8055, 고인돌박물관(5월 5일 월요일 정상 운영) 560-8666, 운곡습지탐방안내소 070-4117-7076, 선운사 관광안내소 560-8687.


■맛

고창에 와서 복분자와 장어를 먹지 않으면 전라도말로 '헛방'이라고 한단다. 그만큼 이들의 인기는 높다. 고창에서 장어를 즐기는 법은 크게 세 가지. 심원면 일대의 바닷가로 나가 직접 구워 먹는 '셀프 장어', 선운사 아래 상가에 즐비한 양식 풍천장어, 그리고 다 자란 장어를 바다 가두리에서 먹이를 주지 않고 축양하는 순치 과정을 거치는 '준자연산' 장어를 파는 우리풍천장어(563-8882) 등이다. 석정웰파크시티 인근의 백합·바지락 전문 한식당 본가(561-5881)나 청보리밭이 있는 학원관광농원식당(564-9897)의 청보리비빔밥(7천 원)과 메밀묵(1만 원)도 유명하다.


■제11회 청보리밭축제

(chungbori.gochang.go.kr)

축제는 예정대로 5월 11일까지 계속되지만 '여객선 침몰 대참사' 여파로 가무가 들어가는 행사는 일절 없앴다. 토, 일요일 하루 10회씩 '고창읍성~고인돌유적지~청보리밭' 구간의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고창터미널(563-3388)에서 청보리밭 축제장으로 가는 시내버스도 있다. 축제장 내비게이션은 전북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길 158-6. 문의 063-562-9897. 김은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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