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달맞이언덕의 안개] 17. 안개비에 젖은 살인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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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달맞이언덕은 아침부터 안개비에 젖어 있었다. 오후 2시쯤 '죄와 벌'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곰 형사가 불쑥 나타났다.

"얼마 전 달맞이언덕에 일가족 살인사건 일어난 거 아십니까?"

"신문에 크게 났더구먼. 왜 하필이면 달맞이언덕에서…."

"수사를 해 보니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달맞이언덕에서 일가족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은 일주일쯤 전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달맞이언덕 뒤쪽, 바다도 보이지 않는 응달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조그만 아파트로, 재개발을 앞두고 삭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아파트 건물은 입주민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세입자들만 조금 남아서 강제 철거에 맞서 버티고 있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은 바로 그 세입자 집이었는데, 집 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피해자 세 명은 노파와 소녀 두 명으로, 모두 여자들이었다. 노파는 그 집에 세 들어 산 지 5년이 넘었는데, 13평짜리 조그만 아파트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 둘을 기르며 근근이 살아왔다.

"1억이 넘는 돈을 은행에 입금시키고
통장을 만들어 갖다 준 사람은 은영이 아니라 변태수였어요
돈에 쪼들리고 있고, 그래서 결혼식도 못 올리고 있던 그는
그 돈을 보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노파와 두 소녀는 모두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흉기에 머리를 얻어맞고 죽어 있었다. 세 명을 잔인하게 때려 죽인 것을 보면 힘이 센 남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곰은 비좁은 실내에 절어 있는 가난의 때와 그 냄새를 접하고 가슴이 저려 왔다.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 삶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다니! 도대체 살인자는 어떤 놈일까? 일단 강도일 가능성은 배제했다. 강도가 부잣집들을 놔두고 가난한 집에 숟가락을 훔치러 들어왔을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강도가 아니라면 남는 것은 원한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곰은 먼저 지문과 유전자 감식 등 단서와 증거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수사진을 풀어 관련자들을 찾아보았다. 집 안 여기저기에서 채취한 지문들을 검사해 보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피해자들의 것으로 밝혀졌다. 침입자의 지문이 없다는 것은 범인이 시간을 두고 자신의 지문을 철저히 지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리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해도 뭔가 하나쯤 흘리기 마련이다. 경찰은 집 안에서 침입자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두 올을 발견, 그것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넘겨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다.

피해자들과 가장 가까운 관련자는 아이들의 부모였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국과수에서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왔는데 그 머리카락은 노파의 아들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노파의 아들 것인지 어떻게 알았죠?"

"노파의 아들은 조문구라는 자로 경찰에 DNA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전과가 많습니다."

"그놈이 범인이구먼."

"그렇다면 제가 왜 선생님을 찾아왔겠습니까? 그게 좀 이상합니다. 조문구는 현재 교도소에 있습니다. 살인미수로 2년 넘게 복역하고 있는데 그동안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놈 머리카락이 노파 집에서 발견된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음, 그거 이상하군."

나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안개 속으로 길게 내뿜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내 머릿속은 벌써 내가 간직하고 있는 살인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헤집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특이한 살인사건들과 거기에 얽힌 수사비화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 서로 뒤엉켰다가 실타래처럼 풀려나가고 있었다.

"조문구라는 자를 만나 봤나요?"

"네, 안양교도소에 가서 만나 봤습니다. 모친과 딸들이 죽은 것을 말해 줬더니 대성통곡을 하더군요."

"머리카락 이야기도 했나요?"

"네, 이야기했습니다. 당신 머리카락이 사건 현장에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자 어이없어하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두 손으로 안개비를 떠서 얼굴을 씻었다. 얼굴을 문질러 대자 뭔가 퍼뜩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조문구를 다시 한 번 만나 보는 게 어떨까? 이건 그냥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는 건데…혹시 일란성쌍둥이 형제가 없는지 한 번 물어보세요. 만일 있다면 그 사람 유전자는 조문구와 같습니다."

"일란성쌍둥이는 유전자가 같나요?"

곰은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허둥지둥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포의 손을 가만히 잡으면서 말했다.

"전에 이런 사건이 있었어요. 강간범이 흘린 정액에서 채취한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수의 것과 일치했어요. 하지만 그 죄수는 강간사건이 일어나던 그 시간에 교도소에 있었어요. 결국 일란성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 쌍둥이가 범인으로 체포됐어요."



다음 날 오후 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는데 그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문구 말이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쌍둥이 형제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살기가 너무 어려워 어머니가 쌍둥이 하나를 버렸답니다. 문구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갓난아기 때 헤어졌기 때문에 전혀 기억이 없답니다. 문구 모친은 생전에 버린 아들을 한 번 만나는 게 소원이었답니다. 그 아들을 못 잊어 아이를 버린 곳을 찾아가 수소문한 결과 스웨덴 가정에 입양된 것까지 알아내고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답니다."

"그 입양되었던 아들이 결국 어머니를 찾아와서 세 사람을 살해했다는 건가?"

"그렇게 볼 수밖에 없잖습니까?"

"어째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물었다.

"신원은 알아냈나요?"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수백만 명이나 되는 외국인 입국자들 가운데서 이름도 모르는 범인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뭐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의외로 쉽게 알아낼 수도 있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용의자가 스웨덴으로 입양되었다면 스웨덴 국적을 가졌을 텐데…아무리 외국인 입국자가 수백만 명이라 해도 그중에 스웨덴 사람은 몇 명 안 될 거예요. 출입국관리소에 가면 최근에 입국한 스웨덴인들 여권을 컴퓨터 파일에 저장해 둔 게 있을 거예요. 그걸 보면 거기에 사진들이 나와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조문구와 꼭 닮은 동양인을 찾아봐요. 그 사람이 바로…."

"아아, 알겠습니다. 역시 선생님은 대단한 추리작가이십니다."



일주일쯤 지나 곰이 또 흥분해서 전화를 걸어 왔는데 조문구의 쌍둥이 형제가 입국한 사실이 드러났고, 예상대로 그의 국적은 스웨덴이고, 이름은 헨릭 가르델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던 날 인천공항을 통해 이미 출국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살인사건 수사기록과 유전자 감식 결과 등 제반 서류를 작성해서 스웨덴 대사관에 보낼 예정입니다. 스웨덴하고는 범인 인도협정이 체결되어 있기 때문에 요건만 갖춰져 있으면 신병을 인도받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인터폴에도 가르델을 1급 살인 용의자로 수배해 달라고 요청할 계획입니다."

"그 사람이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되는 건 시간문제겠군요. 기대되는 군요."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곰은 용의자가 조만간에 한국으로 인도될 것이기 때문에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하더니 반년이 지나도록 통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곰이 마침내 가르델이 수일 내로 한국에 도착할 거라고 알려 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한 스웨덴 대사관 측에서 영어 잘하는 한국인을 붙여 달라고 요청이 와서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영어가 별로 능숙하지는 않지만 용의자를 직접 대면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곰의 제의를 못 이기는 체하고 받아들였다.

"스웨덴 대사관 말로는 가르델은 엄청난 부자랍니다. 양부모가 원래 대기업을 운영할 정도로 재벌이었는데 세상을 떠나면서 재산을 모두 가르델에게 물려줬답니다. 워낙 부자이다 보니까 그의 신병을 한국으로 넘길 때 스웨덴 국내에서는 말이 많았답니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병을 한국에 인도했답니다."

공항에는 어느새 소식을 듣고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일반 손님들이 먼저 빠져나온 뒤 가르델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나는 그들 가운데 가르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행은 모두 다섯 명으로 남자 네 명에 여자가 한 명이었다. 남자들 가운데 한 명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가르델이었다. 그가 가르델임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곰 역시 당황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처럼 맥 풀린 표정은 아니었다.

가르델은 조금 마른 얼굴에 창백한 표정이었고, 기자들의 질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는데, 지적이고 현명한 모습이 정신이상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다른 남자 세 명은 스웨덴 주재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청 소속 직원과 가르델의 개인 비서, 그리고 변호사였다. 금발에 키가 큰 여자는 한국 주재 스웨덴 대사관 직원이었다.

"조문구하고 얼굴이 똑같습니다."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갈 때 곰이 나에게 흥분해서 귓속말로 말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일행은 소형 버스에 모두 타고 있었기 때문에 곰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해운대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가르델 일행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나는 곰을 주차장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화가 난 투로 말했다.

"가르델의 생모와 조카들은 5층에 살았는데 그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걷지도 못하는 가르델이 어떻게 휠체어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서 세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요? 범행 후 어떻게 혼자 5층을 내려올 수 있어요? 잘못 소환했어요."

"고, 공범이 있지 않을까요?"

곰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까 맥이 풀렸을 때와는 달리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르델이 생모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지옥으로 추락했던 인간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아 나는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취조실로 들어간 나는 곰보다 더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곰은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내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영어로 질문을 던지면 금발 여자가 그것을 가르델에게 스웨덴어로 통역해 주고, 가르델이 스웨덴어로 말하면 금발이 영어로 바꿔서 나에게 말해 주는 식으로 심문이 진행되었다.

가르델은 소아마비로 어릴 때부터 두 다리를 전혀 못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양부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성악을 공부했고, 현재는 스웨덴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양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물려받은 기업을 대신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공연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는 것이 고민이라면 고민이었다. 휠체어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감동적일 것 같았다.

가르델은 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생모의 참혹한 죽음에 비통한 감정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한참 후에 그는 눈물을 닦고 나서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을 하나 보여 주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여자로 이름은 차은영, 외국어대에서 스웨덴어를 전공했고 어학 연수차 스톡홀름에 왔을 때 가르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고 했다. 차은영은 가르델의 부탁으로 회사 일은 젖혀 둔 채 가르델의 생모를 찾는 일에 주력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생모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자 난생처음으로 가르델은 중간에 통역을 두고 생모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은영과 함께 한국으로 날아왔다.

"아파트 5층으로 올라갈 때 어떻게 올라갔나요? 은영 씨가 업어 줬나요?"

"아뇨. 은영 씨는 힘이 없어요. 그리고 임신 중이기 때문에 무거운 걸 들면 안 돼요. 은영 씨 애인이 업어 줬어요. 차도 운전하고 그분이 수고 많이 했어요."

차은영은 미혼으로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성실한 남자로 바쁜데도 불구하고 가르델이 한국에 있는 동안 온갖 궂은일들을 도맡아 했다고 했다.

"생모를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

"붙잡고 울기만 했죠. 어머니는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서럽게 우셨어요. 나는 엄마를 원망한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어머니는 쌍둥이를 낳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남편이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바람에 생활이 몹시 어려웠대요. 도저히 둘을 기를 수가 없어 하나를 보육원 앞에다가 갖다 버렸는데 옷 속에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 두었대요. 그때 제 이름이 조순구였답니다."

그가 놀라고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생모의 찌든 가난을 목격하고서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파트 5층에 업혀서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비좁고 남루한 살림살이에 그는 그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와 함께 제일 먼저 생모와 조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집부터 마련해 주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10만 달러를 찾아 그것을 한국 돈으로 환전한 다음 은행에 예치했는데 은영이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처리해 주었다. 은영은 생모의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했고, 은행 통장과 함께 새로 만든 도장까지 가르델이 보는 앞에서 생모에게 전해 주었다.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돈을 더 부칠 생각이었습니다. 세 식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방이 여러 개 있는 아파트를 구입하라고 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가르델의 두 눈에 눈물이 다시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10만 달러면 대충 1억이 넘는 돈인데 그 돈이 입금된 통장은 보지 못했습니다."

곰이 한참 만에 말했다. 그는 사건 발생 직후 유품들을 빠짐없이 수거해서 점검해 보았는데 거액의 현찰이 들어 있는 통장은 없었다고 부연해서 강조했다. 나는 곰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차은영을 만나 봐야겠는데요. 전화를 걸면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저녁때 집으로 쳐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차은영의 집 주소는 가르델이 보관하고 있는 그녀의 휴대전화번호를 통해서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차은영을 범인이라고 보십니까?"

차은영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향해 출발했을 때 곰이 물었다.

"글쎄, 두고 봅시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뒷좌석은 처음 보는 형사 두 명이 차지하고 있었다.

해가 진 아파트 단지는 가로등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어두워 보였다. 형사 한 명이 경비실로 가서 경비원에게 먼저 차은영의 집으로 인터폰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인터폰을 몇 번 누르고 난 경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안에 아무도 없는 모양인데요. 아, 저기 오네요."

경비원은 경비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젊은 두 남녀를 턱으로 가리켰다. 장을 봐 오는지 두 사람 다 무거워 보이는 쇼핑백들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형사가 신호를 보내자 차 안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형사들이 밖으로 나와 차은영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맨 뒤에 차에서 내려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때 차은영과 함께 걸어오던 남자가 갑자기 쇼핑백을 집어던지더니 몸을 돌려 냅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 명의 형사들도 번개처럼 그 뒤를 쫓았다. 곰이 뛰는 것을 보고, 그 날쌘 동작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차은영은 땅에 흩어진 토마토와 고추, 오이, 호박 같은 채소류를 주워 담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남자들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차 소리도 끼익 하고 났다.



차은영의 동거남인 변태수는 차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의식을 잃었다가 사흘 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의사가 말렸지만 곰은 듣지 않고 병실로 밀고 들어가 진술을 받아냈다. 그 진술을 끝내고 나자 태수는 다시 의식을 잃었고, 다음 날 그는 서른다섯 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날 밤 곰은 술에 취한 채 나를 찾아와서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주절주절 입을 열었다.

"1억이 넘는 돈을 은행에 입금시키고 통장을 만들어 갖다 준 사람은 은영이 아니라 변태수였어요. 은영이 대신 시킨 거죠. 돈에 쪼들리고 있고, 그래서 결혼식도 못 올리고 있던 그는 그 돈을 보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포가 따라 준 와인을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놈은 렌터카로 가르델을 안내했어요. 가르델은 일주일 동안 생모하고 지냈는데 집이 좁아서 호텔에서 숙박했어요. 가르델이 생모하고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갔을 때 태수는 공항에서 그가 떠나는 것을 본 후 바로 생모 집으로 갔어요. 그때 은영은 동행하지 않았어요. 생모는 그를 보고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하면서 차와 과일을 대접했어요. 태수는 차와 과일을 다 먹고 나서 일어서더니 가방에서 갑자기 망치를 꺼내 생모의 머리를 내리쳤어요. 노파가 비명도 못 지른 채 쓰러졌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 손녀가 너무 놀라서 꼼짝도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어요. 놈은 주저하지 않고 그 애의 머리를 내리쳤어요. 그리고 집 안을 뒤져 통장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통장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는 거의 미쳐 버렸어요. 큰 손녀가 집에 돌아온 것은 그때였어요. 그는 그 애한테 통장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그 애도 그게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살려둘 수도 없고 해서…살려 달라고 애걸했지만…."

"세상에. 돈도 못 찾고 사람만 죽였군요."

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놈은 밤새 통장을 찾았고 밤새 집 안을 치웠어요. 지문을 지우고, 쓸고, 닦고…. 그런데 그 노파가 통장을 어디다 숨겼을까요?"

안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안개는 바닥에 깔려 있었다. 마치 밤의 바다에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인에 대해 철학적 사유를 하다가 지쳐서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김성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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