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사고] 21년 전 '서해훼리호' 사고와 판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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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가 1993년 전북 부안에서 발생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와 당시 상황부터 혼란스러운 수습과정까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이 때문에 20년이 지났는데도 해양 사고에 대한 안전의식과 사고 수습 능력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기상 악화 속 무리한 항해
정부 당국 늑장 대처까지


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전북 부안의 파장금항을 거쳐 격포항을 항하던 중 오전 10시 10분께 침몰했다. 당시 배에는 낚시객과 위도 주민 등 362명이 타고 있었고 그 중 292명이 숨졌다.

서해훼리호와 세월호 사고는 악화된 기상 속에서 무리하게 항해를 하다 발생했다는 점에서 '안전불감증'이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서해훼리호 사고 당시 기상청은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된다"고 방송했으며 서해훼리호는 회항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세월호 역시 짙은 안개와 높은 파도를 무시하고, 예정보다 2시간 남짓 뒤인 지난 15일 오후 9시 출항했다.

정부 당국의 늑장 대처도 판박이다.

서해훼리호가 사고가 난 지 5분 만에 군산해양경찰서에 신고가 접수됐다. 하지만 사고 발생 55분 만에 경찰헬기가, 1시간 만에 경비함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세월호 사고는 16일 오전 8시 55분에 신고가 접수됐지만 첫 구조작업이 시작된 시간이 42분이 지난 오전 9시 40분이었다.

목포 해경과 전남 영암군 해군 기지에서 사고 해역까지의 직선거리는 30㎞ 정도다. 헬기로 10분 거리다.

승선 인원 파악조차 제대로 안돼 정부 당국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마찬가지다.

서해훼리호는 사고 당시엔 승선인원이 221명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362명이었다. 해경은 초기 승선인원이 140여 명이라고 공식발표했다.

세월호 공식 승선인원도 459명과 475명을 오락가락했다. 심지어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발표가 났을 정도로 정부 당국의 초기 상황 집계에 허점이 드러났다.

서해훼리호 사고 당시에도 승선인원조차 파악 못하는 정부에 질타가 쏟아졌는데 21년 뒤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서해훼리호 사고 때 "선장이 도망쳤다" 등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세월호 사고 뒤에는 SNS 등에서 단원고 학생을 사칭한 글들이 퍼졌다.

다만 서해훼리호의 선장은 배를 지키다 뒤늦게 주검을 발견됐고, 세월호 선장은 사고 초기에 탈출한 것이 다르다. 김백상 기자 k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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