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해안누리 국토대장정] 14. 남해 두모유채꽃밭~상주 은모래비치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꿈길 같은 유채꽃길 … 알록달록 무지개 같은 행렬이 이어졌다

국토대장정 대원들이 남해 두모마을 유채밭을 지나고 있다. 황홀한 유채밭에서 마음속 깊이 두른 외투를 벗어던졌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은 그리움이다. 한 단잠이다. 그래, 상사몽이다. 남해 두모마을 유채꽃밭에서 길을 잃었다. 이 길이 정녕 꿈길이면 임을 만날 것도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벌들이 윙윙대고, 꽃향기가 코밑으로 스며들었다. 꿈길의 행렬은 무지개처럼 이어졌다. 그 길에서 잊힌 봄날의 여러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남해 바래길 3구간 '구운몽길'. 14차 S&T국토대장정은 늘 그립고 그립던 그 무엇과 꿈길에서라도 만나 소통하는 한바탕 달콤한 꿈이었다.


■그대와 꾸는 아홉 개 꿈

하필이면 봄이고, 하필이면 구운몽길이었다. 두모마을 입구 남해대로에서 차를 내려 채 떠지지 않는 눈으로 바라봤을 때 주변은 온통 노란색이었다. 황홀한 유채밭은 봄의 종지부를 찍었다. 비로소 마음속 깊이 두른 외투를 벗어던졌다.

유달리 많은 400명의 참가자가 이번에도 함께했다. 왜 이렇게 많이 왔을까, 속으로 생각했지만 부끄러운 질문이었다. 봄날인 줄 몰랐던 게다. 유독 혼자만.

유채꽃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그 바다에 노도가 보인다. 서포 김만중은 초년과 중년은 '득의의 세월'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말년은 불운했다. 적소 남해 노도에서 생을 마쳤다.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그가 노모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소설 '구운몽'은 한바탕 꿈을 이야기한다. 꿈 같은 이야기, 꿈 같은 풍경에서 황진이의 노랫말에 음을 붙인 가곡 '꿈길에서'를 웅얼거린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가사 뒷부분이 생각이 나지 않아 계속 같은 소절만 반복했다.

두모마을 입구에는 집채만 한 바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생경하기도 한 풍경이었다. 김춘자 할머니가 "두꺼비 바위지. 배를 봐! 볼록하니 두꺼비 맞잖아"하고 가르쳐 준다. 마을에서 뒤를 돌아보니 영락없는 두꺼비다. '두모'라는 마을 이름도 옛날 도인이 마을 이름을 두모로 바꾸면 잘살게 된다고 해서 지은 것이란다.

마을 들판은 온갖 꽃들과 마늘 등 채소가 심겨 있어 참 풍요로웠다. 아쉬울 것 없는 시골 사람들의 마음이 부자인 것일까. 두모마을은 이름값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다랑논에 심어 놓은 것

해안을 따라 오롯하게 난 길을 걷는다. 소량마을이다. 돌담을 예쁘게 쌓아 올린 집에 담쟁이가 벌써 여린 잎을 키워 놓았다. 마을 당산나무는 제법 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다. 쉴 틈에 어느 새 사람들이 당산나무 아래로 간다. 그늘이 좋았던 것이다.

마을 뒤 마늘밭 사이로 올라 해안누리길을 걷는다. 긴 행렬은 알록달록 무지개 같다. "아따, 부산사람들 다 왔는가벼. 끝이 안 보이네, 끝이…." 콩을 심으러 나온 한 농부가 농을 하며 반가운 체를 했다. 그러고 보니 긴 대열이 예사롭지 않다.

다랭이 논이 여기에도 있었다. 삿갓을 벗어 놓고 찾지를 못했다는 크기의 삿갓배미도 있고, 그런 논들에 물을 대기 위한 둠벙들도 있었다. 다들 작게는 사람 한 길, 높게는 두서너 길 높이로 돌담을 쌓아 만든 논이다. 돌을 캐서 다랑논 보수에 한창인 노부부가 있었다. 척박한 섬. 한 뙈기 땅이라도 늘려 뭐라도 심어야 했기에 다랑논(다랭이논)이 탄생했다.

돌 하나 놓고, 흙 한 삽 뜨고,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이 논들은 존재하기 시작했으리라. 지금은 농사가 버거운지 버려놓은 논들도 많았다. 하지만 어김없이 마늘, 고사리, 땅두릅을 심어 땅을 가꾸고 있었다.

해안누리꾼들의 정겨운 대화가 이어졌다. "이것은 고사리, 이것은 두릅, 저것은 뭐지. 아, 콩을 심어 놓았구나. 금줄을 쳐 놓은 걸 보면." "그래 비둘기가 파 먹지 말라고 해 놓은 거 보니 콩 심은 것 맞네."

척척 도사들이 누리꾼들이었다. 문화해설사나, 어떤 전문가가 아니어도 국토대장정에 참가한 해안누리꾼들은 유년의 기억을 들춰내며 끊임없이 '문화 해설'을 해 주었다. 귀만 열어 놓으면 끝.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작은 포구가 아늑한 대량마을에서 한참을 쉬었다. 멀찌감치 앉아 있는 외국인들에게 다가갔다. S&T 인도 현지 법인에서 한국으로 파견 나온 엔지니어 만수르 씨와 니켓 씨였다. 주말이면 때때로 한국 여행을 다니지만, 해안누리 국토대장정만큼은 빠지지 않고 동행한다고 했다. 어떻더냐고 물으니 "한국 경치, 원더풀"이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봄은 꽃들을 키웠다. 대량마을을 지나 난등들로 접어들자 길섶에서 꽃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민들레, 양지꽃, 각시붓꽃, 쇠물푸레나무꽃. 꽃들만 예쁜 것이 아니었다. 느티나무의 새잎과 개옻나무의 새순도 예뻤다. 제비꽃도 예뻤고, 돈나무의 순도 꽃보다 더 예뻤다.

난등들을 지나니 길이 없어졌다. 나중에 상주면사무소 주민생활지원과 강현미 주무관에게 전화를 걸어 난등들의 지명 유래를 물었다. "난등들은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들이라고 마을 이장님께서 말씀하시네요."

도로는 이제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오솔길, 남해 바래길로 바뀌었다. 더러 밧줄을 잡아야 했고, 오르락내리락 신경을 써서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숲으로 난 길에서 바라 본 해안 절경은 소설 구운몽 속의 신선이 사는 장면이었고, 푸른 바다는 헛된 꿈이라도 키우기에 좋은 곳이었다.

상주해수욕장은 은모래비치로 이름을 고쳤다. 더 좋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모래는 예전의 그 모래일 것이다. 상주은모래비치 입구 금전마을의 바다로 흐르는 하천에서 주민이 통발로 뱅어를 잡고 있었다. 온몸이 투명한 뱅어는 이맘때만 나온다고 했다. 볼락 미끼로 쓴단다.

솔숲이 우람한 은모래비치. 어김없이 모인 뒤풀이 막걸리 자리에서 S&T그룹 최평규 회장이 꽃타령을 했다. "이 꽃 저 꽃 다 이뿌지만 아무리 하찮아도 예쁘지 않은 꽃은 없네요." 바야흐로 봄날이었고, 왕벚나무에서는 꽃비가 휘날리고 있었다. 바다에서 시나브로 불어오는 바람도 차지 않아 은모래밭에 오래 궁둥이를 붙이고 있어도 춥지 않았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남해 절경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인 구운몽길에서 만난 진초록 마늘밭.
하늘빛 바다.
밤배 노래비.
탄성 터지는 해식애.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