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 진주 경남수목원·가좌시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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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뻗은 연초록 잎, 화사한 꽃사태에 '아름다운 몸살'

봄이 깊어간다. 연초록빛 세상이다. 모든 숲은 사람 마음을 다스린다. 경남수목원 메타세쿼이아 길(왼쪽)과 가좌시험림 대숲 길.

누가 그랬다. 사월의 길목에 살고 있는 건 감동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무는 몸살을 앓는다. 꽃 피우기 위해 모든 성장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줄기도, 뿌리도 양분을 양보한다. 꽃가루받이 못하면 열매 없으니 도리 없다. 하나 어쩌랴. 사람에겐 그저 아름다운 몸살인 걸. 그 몸살 사태 보려 진주를 택했다. 가좌시험림 대숲도 탐났지만 순전히 경남수목원 때문이었다. 부산 근교 꽃나무 상춘지로 그만한 데가 또 어디 있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딴 이유가 컸다. 잠시 개인사를 들춰야겠다. 부친이 꽃나무를 무척 좋아했다. 봄날이면 어딘가로 떠났다. 저물녘, 꽃구경 취미 없어 동행 뿌리쳤던 아들에게, 꽃물 든 얼굴로 타박처럼 말하곤 했다. "참 좋았네." 평생 곁에 머물 줄 알았던 부친이 6년 전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 하필 천상병 시인이 '귀천'했던 그 달이었다. 부친이 늘 "함께 가자" 권했던 데가 경남수목원이다. 부산에서 기껏해야 두 시간 거리. 그때는 웬 심통이었는지. 귓전으로 흘리다 돌이킬 수 없게 되어서야 혼자서 그곳을 찾았다. 그날은 기일이었다. 부친 봉안하던 날 무던했던 바람 끝은 이날도 무던했다. 꽃물 든 얼굴을 제사에 올렸다. "실컷 보니 참 좋습디다."

신변잡기가 길었다. 진주는 색색 꽃으로 화사하고, 연초록빛 잎으로 싱그럽다. 봄이 깊어간다.

꽃무리 가득한 화목원, 수목원의 절정 뽐내
긴 꽃자루 바람 타는 '꽃아그배나무' 예뻐요

연암공업대 뒤편 가좌산 자락에 펼쳐진 대숲
호젓한 숲 되었다가 사색의 숲도 되어요


■경남수목원에서


이맘때 경남수목원의 절정은 화목원에서 이뤄진다. 빨갛고 노랗고 하얀 꽃무리로 눈이 어지럽다. "올 들어 가장 화려할 때 오셨네요." 숲해설사 신선이 씨 따라 꽃밭을 헤맸다. 꽃 내력 듣다 고개 끄덕이곤 돌아서 까먹고를 되풀이했다. 하나같이 무거운 생명을 단박에 구별하기가 어디 쉽겠나. 그래도 기억에 자리 잡은 녀석이 몇 있다.

꽃아그배나무.

꽃아그배나무. 예뻤다. 숲해설사는 올해 이 꽃에 마음이 닿았다 했다. 열매가 작아서 아기배로 불리다 아그배가 됐다. 제법 긴 꽃자루가 바람 타면 보는 마음도 흔들린다. 조팝나무. 시골길에서 흔히 봤던 나무였다. 꽃이 조밥 흩뜨려 놓은 것 같아 조팝이다. 싸리꽃이라고도 한다. 이 꽃 피면 농부들은 농사를 준비한다. 산당화. 요염하다. 농익은 봄기운이 뚝뚝 흐른다. 한때 처녀에겐 위험한(?) 꽃이었다. 붉은 꽃잎 살랑이면 싱숭생숭해져 처녀 있는 집엔 안 심었다. 흰 민들레. 토종 민들레는 드물다. 노란 민들레는 외래종이 많은 반면, 흰 민들레는 거의 토종이다. 그 꽃이었다. 외래종과 토종 구분은 꽃받침으로 한다. 아래로 처져 있으면 외래종, 꽃잎을 감싼 형태면 토종이다.

숲해설사 설명을 경청하는 내내 부러웠다. 수십 종의 꽃나무와 야생화 이름을 짚어 내는 그네 지식은 시샘 받아 마땅한 선물이다. 알면 더 잘 보이니 봄날은 그네 것이 아닐는지. "헷갈리지만 조금 덜 헷갈릴 뿐입니다." 나무 제대로 즐기는 법이 있다. 간단하다. 욕심 버릴 것. 한 번 방문 때 눈에 차는 서너 가지 수종만 새겨 놓으시라. 한꺼번에 움켜쥐다간 손아귀에서 다 빠져나간다. 그게 세상 이치다. 무엇보다 꽃은 내년에도 핀다. 나무 몸살은 괜한 게 아니다.

메타세쿼이아가 경남수목원을 에둘렀다. 지금의 메타세쿼이아는 황지우 시인의 그 나무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는' 나무 말이다. 연초록빛 새순이 껍질 갈라지고 가지 구부러진 고목에 달렸다. 덜 자라고 성긴 탓에 하늘을 덮지 못했다. 그래서 생긴 하늘엔, 땅 길 닮은 길이 열렸다. 위와 아래 길은 폭이 동일하다. 땅 길 굽으면 하늘 길도 굽고, 땅 길이 아득히 내달리면 하늘 길 역시 내달린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네 군데 있다. 걷고 또 걸어 볼 일이다.

전망대 가는 숲길을 빼먹으면 아쉽겠다. 길섶 나무 듬성듬성하고 인적 분명한 평범한 길인데도 발길 잡는 구석이 있다. 뺏긴 시간이 즐거웠다. 이 봄 지나면 내년 기약해야 할 봄길이다. 

황매화.
산림박물관.

■가좌시험림에서

진주엔 대숲이 유독 많다. 진산으로 꼽히는 비봉산(飛鳳山)에서 유래한다. 비봉산은 봉황이 날개 벌린 형상이다. 옛 진주사람들은 태평성대 상징하는 봉황을 붙들려 했다. 대나무를 여기저기 심었다. 봉황의 주식이 죽실, 대나무 열매니 당연한 염원이었다. 실제 쓰임새도 한몫했다. 남강 홍수 범람을 차단하는 일종의 방수림이었다. 경남일보 주필이었던 위암 장지연 선생은 '진양잡영'이란 글에서 대나무를 '진양 삼절' 중 하나로 적었다. 경상대 강동욱 강사 얘기다. 진양은 진주를 일컫는다.

이런 진주에서도 대숲으로 유명한 데가 국립산림과학원 남부산림자원연구소 가좌시험림이다. 연암공업대 뒤편 가좌산 자락에 있다. 1972년 조성됐다. 대나무의 이전 주소지가 부산이란다. 그 옛날 동래 금강공원 대나무를 경남산림환경연구소가 인수한 후 남부산림자원연구소가 맡게 됐다. 그 옛날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본산 50종, 중국산 62종이 더 들어왔다. 이후 진주시청은 가좌시험림을 가좌산 산책로로 지정했다.

연암공업대 정문 근처 목재 계단을 따라 오르면 대숲이 펼쳐진다. 대나무와 편백나무로 울창하다. 덱이 설치된 대숲 길 양 옆으로 맹종죽이 도열했다. 우리나라 대나무의 3대 주종인 맹종죽, 왕대, 솜대 중 하나다. 직경만 따져 왕대가 4~8㎝인 반면 맹종죽은 10~12㎝로 더 굵다. 남부산림자원연구소 신현철 과장 말이다.

덱 있는 대숲 길은 빠른 걸음으로 10분이면 족하다. 그러나 이 대숲은 30분짜리 호젓한 숲이 되고, 1시간짜리 사색하는 숲이 된다. 숲은 느끼는 깊이 만큼만 제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다. 서성이던 바람이 대숲을 훑었다. 댓잎이 서늘하게 떨린다. 스스슥. 밀려왔다 쓸려 가는 소리가 대숲을 채웠다. 사월 봄소리겠다.

"조금 더 가면 왜가리를 볼 수 있어요." 문화해설사 구경희 씨 말에 발길을 재촉했다. 여남은 마리가 대숲에서 노닐었다. 왜가리는 봄철과 여름철을 이곳에서 난다. 그러다 가을에 자취를 감춘다. 운치 있는 풍경이지만 대숲 입장에선 대략 난감하다. 집단 서식하는 왜가리의 배설물은 요산 수치가 높아 대숲에 해롭다. 이 또한 자연이니 별 수 없는 노릇.

가좌시험림에서 내려오는 길. 완연히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대숲 바닥에 자글거렸다. 차가운 대숲도 살짝 붉은 기 돌아 따뜻했다. 평화롭고 포근한, 또 다른 세상. 답답했던 생각들이 빠져나가고 차분해진다. 숲은 이렇게 사람 마음을 다스린다. 귀갓길이 가벼웠다.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ilbo.com


TIP

■경남수목원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에 위치한 58만㎡의 수목원. 국내외 식물 2천700여 종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산림박물관과 화목원, 열대·난대·수생·민속 식물원, 장미·철쭉원, 수종식별원, 야생동물원 등으로 구성. 055-254-3811.

■교통

자동차:남해고속도로~진성IC~국도 2호선(마산 방면)~경남수목원~진마대로~진성터널~개양오거리(시청 방면)~GS25 가좌오거리점(석류공원 방면 좌회전)~연암공업대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진주시외버스터미널(1688-0841)까지 1시간 30분 걸림. 오전 5시 40분~오후 9시 30분 출발. 15~20분 간격으로 운행. 7천700원. 진주시외버스터미널~경남수목원은 280번 버스 탄 후 일반성 터미널에서 내려 무료 셔틀버스 승차. 40분 걸림. 1천200원.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연암공업대는 130, 132, 141번 버스를 탄다. 20분 걸림. 1천200원. 임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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