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메일' 한 남자가 걸어온 길… 이 땅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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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일제 식민시대였던 1934년 황해도 황주의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00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일흔셋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이름은 홍성섭 씨. 세상을 떠나던 그해 둘째 딸 홍재희 감독에게 뒤늦게 배운 컴퓨터와 '독수리 타법'으로 43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홍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이메일'에서 유서 같은 이메일을 바탕에 두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스크린으로 불러낸다. 그리곤 아버지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며 고단했던 한국의 현대사를 조망한다.

아버지의 이메일. 인디스토리 제공
"단순한 이메일이 아니라 당신 일생에 대한 자성이자 과거를 기억해 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던 홍 감독의 고백처럼 이 작품은 한 남자가 걸어온 길을 차분히 따라가 본다.

'2008년 12월 23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란 내레이션으로 막을 올린 영화는 이내 그의 부친의 행적을 추적한다. 해방공간에서 열다섯 살이 된 홍성섭은 홀로 3·8선을 넘고 이내 6·25 전쟁을 맞는다. 젊은 홍경섭은 인천에 정착해 미군부대 파지장사를 하며 여관을 살 정도로 큰돈을 벌었지만 사기를 당해 무일푼 신세로 전락한다.

그래서일까.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서독 광부를 자청하고, 베트남 전쟁 속에 크레인 기술자로 뛰어든다. 중동 건설 붐이 일자 건설노동자로 사우디에서 모래바람을 맞는다. 그러는 와중에 키가 크고 호남형인 홍경섭은 당시로선 노총각인 서른한 살 나이에 학교 선생과 결혼해 1남2녀를 낳는다.

그토록 일을 했지만 달랑 집 한 채 장만했을 뿐 돈은 모으지 못했다. 그래서 자유로운 해외로 나가길 원했다. 하지만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연좌제'. 처남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된 '빨갱이'라 여권도, 비자도 나오지 않았다. 중동에서 돌아온 그는 실망했고 낙담했다. 그리고 매일 술을 마시며 가족들에겐 꽤나 긴 시간 폭력을 행사했다.

홍 감독은 파란만장했던 아버지의 기억을 비교적 객관적 시각으로 스크린에 펼쳐 보인다. 아버지의 사진이나 가족과 친척들의 증언, 몇 개의 재현 장면을 통해 아버지를 구워 내지만 폭력에 시달렸던 엄마, 언니, 남동생 등 그를 감쌌던 사람들은 몸서리를 친다. 지긋지긋한 아버지를 떠나 미국에 이민을 가 살고 있는 언니는 아예 "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아"라고 솔직하게 고백할 정도다.

이미 고인이 되어, 화해하기에 늦어 버린 아버지와 가족 간 관계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이 다큐가 지닌 장점은 '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아온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한국 남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 우월적인 가장, 좌절한 패배자 마초, 폭압적인 독재자, 우리 사회의 희생양으로 살아야 했던 바로 그 우리네 '아버지'를 말이다. 그러면서 희망과 절망을 넘나들며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진 시간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은연 중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를 버무려 낸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격동기 이 땅에서 '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보내는 헌사처럼 다가온다. 24일 개봉. 김호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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