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달맞이언덕의 안개] 16. 안개, 살인의 철학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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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여비서는 책상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나서 그녀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버클리대 수학과 교수 이학박사 김동희-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직함이었다. 그녀는 명함을 뒤집어 보았다. 거기에는 같은 내용이 영어로 인쇄되어 있었다. 방문자는 50대 초반쯤 되어 보였고, 검은색 스커트 위에 흰 블라우스 차림의 단정한 모습이었다. 키는 자그마했고, 통통하고 호감 가는 얼굴은, 별로 특징 같은 것도 없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인상이었다. 가늘고 작은 두 눈은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생긴 것이야 어떻든 이렇게 수수하게 생긴 여자가 수학과 교수라는 사실에, 그것도 국내도 아닌 미국 유명 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에 여비서는 강한 호기심과 함께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선망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장관님은 지금 회의 중이신데 무슨 일로 그러시는가요?"

"이 책을 드리려고요."

"백정의 피를 물려받은 잔인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선거에 떨어진 것은 문제가 안 됐어요
실추된 우리 집안의 명예가 문제였어요"


김 교수는 묵직해 보이는 검정 백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놓았다. 여비서는 그것을 집어들고 표지를 살펴보았다. '수학으로 풀어 본 미술의 비밀'-흥미로운 제목의 책이었다. 책의 저자는 명함에 적혀 있는 이름과 같은 김동희였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30대의 여비서는 김 교수에게 더욱 호감이 갔다. 하지만 책 한 권 때문에 저자가 장관실로 찾아와 그것을 직접 장관에게 전해 주겠다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저서는 대부분 우편으로 배달되어 오기 마련이었다.

"이 책, 제가 이따가 장관님께 전해 드리면 안 될까요?"

"그래도 되는데 한국에 온 김에 한 번 만나 뵙고 가려고요. 사실은 오 장관님하고 초등학교 동기인데 장관님이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어요. 이번에 이 책을 한국에서 출판하게 되어 20년 만에 귀국했어요. 오후에 출국하는데 그 전에 잠깐 뵈려고요. 장관 되신 거 축하도 드릴 겸 딱 5분만 뵙고 가려고요."

"아, 그러세요. 초등학교 동기시군요."

비로소 그녀가 장관을 직접 만나려고 하는 이유를 알고 난 여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이 책, 장관님한테 먼저 보여 드려도 될까요?"

여비서가 책을 집어 들면서 물었다.

"네, 보여 드리세요."

김 교수는 기대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여비서는 장관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 중이라는 말은 그녀가 그냥 둘러댄 것으로, 장관은 와이셔츠 바람으로 창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작달막한 몸집에 머리가 벗겨지고 배까지 튀어나온, 한 마디로 몸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막돼먹은 모습의 사내였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넓적한 얼굴은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고, 복판에 자리 잡은 매부리코는 한쪽으로 조금 휘어져 있었다. 그 아랫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입은 유난히 커 보였고, 입술은 아프리카 니그로처럼 두꺼웠다. 가늘게 찢어진 두 눈은 금테 안경 너머에서 항상 뭔가 의심스러워하는 듯 번득이고 있어서 가깝게 다가서기가 쉽지 않았다.

문화와 체육을 관장하는 장관이 된 지 5개월밖에 안 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장관으로 발탁된, 되게 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나온 행적을 보면 권력을 향한 그의 구애가 어느 정도 집요하고 끈질겼는지 알 수가 있다. 그는 원래 정치학 전공의 대학교수 출신으로, 거칠기 짝이 없는 극우적인 발언들과 칼럼 때문에 어용 교수로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결국 정치판에 뛰어들어 쉽게 국회의원이 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장관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권력에 이르는 줄을 잘 탔고, 그것을 최대한 잘 이용해서 그가 바라던 대로 장관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장관실로 들어간 비서는 그가 통화를 끝낼 때까지 한쪽에 조심스럽게 서 있다가 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명함과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자야?"

여비서의 설명을 듣고 난 그가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네, 여자분이십니다."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네,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경남 함양의 산골 분교에는 전교생이라고 해야 열댓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분교의 동창생이라니. 더구나 그 분교 출신으로 미국 유명대인 버클리대 수학교수가 됐다니, 한 번 만나 보면 어쩌면 감동적인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잔뜩 호기심이 인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해요."

여비서가 나가자 그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저고리를 입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자그마한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오 장관은 일어서서 그녀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책상 너머로 손을 뻗어 여자의 조그만 손을 잡고 흔들면서 그녀의 평범한 얼굴에서 초등학교 분교 시절의 어떤 소녀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유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워낙 오래전의 잊고 싶었던 시절의 일이라 한두 명의 코흘리개 정도만 생각날 뿐 그 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앉으십시오."

김 교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오 장관과 마주 보는 자리에 놓여 있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온당 분교에 다니셨다고요?"

"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런데 용케 저를 기억하고 계시군요?"

"그럼요. 학교 다닐 때 말도 못하게 개구쟁이였잖아요."

"아, 제가 그랬던가요?"

장관은 기분이 좋아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때 여비서가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찻잔을 놓고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장관은 김 교수에게 차를 권했다.

"드시죠. 그런데 전 기억이 통 안 나네요. 하긴 40여 년 전 일이라서…."

"여자들은 많이 변하잖아요."

"아, 그런가요."

여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그는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얼른 감이 와 닿지 않았다. 잠시 후 그것이 권총인 것을 알고는 놀라서 얼굴이 굳어졌다.

"무, 무슨 짓이야?! 당신 누구야?!"

그는 재빨리 책상 위의 버튼을 누른 다음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권총이 불을 뿜었다. 총탄은 정확히 그의 이마를 꿰뚫고 지나갔다. 여자는 침착한 태도로 장관의 가슴팍을 겨누고 두 발을 더 발사했다. 그 충격으로 장관의 몸뚱이가 풀썩 튀어 올랐다가 도로 의자 위로 동댕이쳐졌다.

안으로 들어서던 여비서는 비명을 지르며 도로 뛰쳐나갔다. 살인자는 권총을 손에 쥔 채, 의자 위에 죽어 있는 장관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사지를 벌린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두툼한 입은 쩍 벌어져 있었고, 가슴팍을 가리고 있는 흰 와이셔츠는 피로 흥건히 젖어 들고 있었다. 이마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에서는 피가 별로 흘러나오지 않고 몇 방울만 맺혀 있을 뿐이었다.



아침에 오치수 장관실에서 발생한 장관 살인사건은 뉴스를 타고 금방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조금 후에는 전 세계 주요 방송에서도 다투어 그것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전국은 한바탕 광풍이 몰아친 것처럼 들썩거렸고, 장관을 사살한 범인이 여자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아침에 장관실을 찾아가 근무 중인 장관을 권총으로 살해한 여자의 잔인함과 대담성에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는 한편으로는 그 같은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했다. 그러나 범인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서 아직 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범행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김동희라는 이름과 버클리대 수학과 교수라는 직함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수학으로 풀어 본 미술의 비밀'의 진짜 저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었다. 범인이 신원을 불지 않아 애를 먹던 경찰은 그녀의 지문을 조회한 결과 본래 이름이 이민혜임을 밝혀냈다. 그녀는 살림만 하는 과부로 슬하에 자식이 둘 있었다. 남편은 1년 전에 사망했고, 큰딸은 결혼해서 대구에 살고 있었고, 아들은 해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죽은 남편은 3년 전 부산 해운대구에서 야권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는데 당시 상대방 여권 후보가 하필이면 오 장관이었다.

그래서 경찰은 당시의 선거 결과에 앙심을 품고 그녀가 오 장관을 살해한 것이 아닌지 추궁했지만 그녀가 한사코 묵비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정확한 이유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곰이 나를 찾아온 것은 오 장관 피살사건이 일어난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나는 그때 '죄와 벌' 테라스에 앉아 창작노트에다 새로 구상한 소설을 쓰고 있다가 안개 속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너무 달게 주무시는 것 같아 안 깨웠어요."

포가 곰과 나에게 커피를 갖다 주면서 말했다.

"안개에 취했던 것 같아."

나는 얼굴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안개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다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곰과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일 있나요?"

나는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 장관 사건 말입니다. 범인이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아 고민인 모양입니다. 여자라 함부로 다룰 수도 없고…."

"이민혜 말이군."

"네, 그 여자 말입니다. 그 여자 아십니까?"

"좀 알고 있지."

"어떻게 아십니까?"

곰의 조그만 두 눈이 번득였다.

"나한테 소설 창작을 배웠거든."

"그게 그렇게 된 거군요."

"소설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날 찾아왔는데…. 한 일 년쯤 오다가 그만 포기했는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조용하고 진지한 여자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개인지도를 했는데 1년 동안 공부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실력이 늘어 오랜만에 뛰어난 제자를 만났다고 속으로 기뻐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나오지 않아 나는 적잖게 서운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는 등 주변 상황이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 같았다.

"선생님한테 소설을 배웠던 여자가 그런 살인을 저지른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에요. 지금도 머릿속이 멍해요."

언제나 조용하고 진지하던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무 특징도 없는 평범한 얼굴이지만 그 내면에 뭔가 폭발할 것 같은 열정과 열망 같은 것이 느껴지던 여자였다.

"서울 경찰청에서 급히 연락이 왔는데 이민혜 씨가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한답니다. 아무도 찾지 않고 선생님만 찾고 있습니다. 선생님한테만은 모든 걸 털어놓겠답니다. 수사본부에서는 그 여자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는 즉시 저희한테 연락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서울로 모시고 오라고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난 갈 수가 없어요."

곰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선생님께서 협조해 주시면 모든 의문이 풀릴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모실 테니까, 바쁘시겠지만 저하고 같이 서울로 올라가시죠."

"가고 싶지 않아요. 대신 이민혜 씨를 이곳으로 데려오면 만나주겠어요. 난 이 자리에 앉아 그 여자하고 와인을 한잔 하고 싶어요. 바로 이 자리, '죄와 벌' 테라스에 앉아서 말이오."

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내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가고 나자 포가 내 어깨를 치면서 "잘하셨어요. 정말 멋진 만남이 될 거예요"하고 말했다.



그날 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이민혜는 경찰차에 호송되어 달맞이언덕의 '죄와 벌'에 나타났다. 그 전에 나는 경찰에 나를 만나는 동안 용의자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지 말 것과 내가 허락한 사람들 외에는 나와 용의자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반경 5m 안으로는 수사관과 기자들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접근시키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서울 경찰청의 수사 책임자는 기자들을 따돌리느라고 밤늦게 도착하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민혜와 나는 안개 속에 앉아 시칠리아 산 와인을 마셨다. 내가 포도 함께 동석해도 좋겠느냐고 묻자 민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포는 가만히 다가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5m 밖 주위로는 수사관들이 삥 둘러 서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길 건너편과 차도에도 경찰이 지키고 있었고, 차도에는 경찰이 타고 온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민혜는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담담했다. 그녀는 안개에 입을 맞추는 듯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3년 전 국회의원 선거 때 오치수가 남편을 모욕했어요. 남편은 그 모욕에 괴로워하다가 암에 걸렸고 1년 전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전 그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치수를 찾아가 사살한 거예요."

그녀는 마치 벌레 한 마리를 죽인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오치수가 남편한테 무슨 모욕을 줬나요?"

"백정의 피를 물려받은 잔인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민심이 돌아서긴 했지만 선거에 떨어진 것은 문제가 안 됐어요. 실추된 우리 집안의 명예가 문제였어요."

"백정의 피를 물려받은 건 사실인가요?"

"그건 사실이에요. 할아버지 대부터 그 일을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선거판에서 공개적으로 그것을 비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것도 엄연히 직업인데…."

"그렇죠. 엄연한 직업이죠.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안 했나요?"

"했다가 취소했어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오치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가지 근거 자료들을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민혜의 남편이 밀도살로 두 번이나 구속되어 형을 살고 나온 전과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혜의 남편은 아버지를 도와 밀도살을 하다가 경찰 단속에 걸려 형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기록들이 공개될 경우 더 치욕적인 모욕이 될 것을 우려한 남편은 결국 고소를 취하했던 것이다.

"권총은 어디서 구했죠? 그리고 사격 솜씨가 뛰어나던데 그건 어디서 배웠죠?"

"러시아 선원한테서 별로 어렵지 않게 구했어요."

6연발 자동권총 한 자루와 탄창 2개를 60만 원에 구입한 그녀는 그 다음 날부터 사격연습장에 회원등록을 하고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격 연습을 했다.

한 달 동안 연습으로 사격에 자신을 갖게 된 그녀는 책방에 가서 한 나절 가까이 책들을 뒤적이다가 마침내 적당한 책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수학으로 풀어 본 미술의 비밀'이란 책이었다. 그 책의 저자인 김동희는 미국 버클리대 수학교수였다. 다음에 그녀는 인터넷을 뒤져 버클리대 마크와 주소, 전화번호, 홈페이지 주소 같은 것들을 옮기고 나서 마지막으로 영어로 김동희라고 써 넣었다. 명함의 한 면은 영어로 이렇게 정리한 다음 다른 면에는 한글로 쉽게 적어 넣었다. 그것을 명함집에 가져가 그럴듯하게 명함을 만든 그녀는 이틀 뒤 오 장관실을 찾아갔다. 책과 가짜 명함은 경비실과 비서실을 쉽게 통과하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었다. 그녀가 의도했던 대로 그 책과 명함은 큰 위력을 발휘했고, 그녀는 아주 쉽게 오 장관실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아주 치밀하게 오 장관 암살을 준비했던 것이다.

"절 이해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선생님밖에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한 거예요."

"난 충분히 이해해요."

"이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일 사형을 안 당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테니까 그 시간에 소설을 쓸 거예요."

"잘 생각했어요."

"제가 소설 써서 보내면 봐주실 거죠?"

"물론이지. 시간 내서 면회도 갈게요."

손목에 수갑을 차고 수사관들에 둘러싸여 안개 속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마지막 남은 피 같은 와인을 쭉 들이마셨다. 그때 포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멋진 여자는 처음 봤어요."

그것은 안개의 속삭임 같기도 했다. 살인에 대한 안개의 속삭임 말이다.

"살인에도 철학이 있는 법이야."

나는 안개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민혜의 뒷모습을 보려고 애쓰면서 중얼거렸다.


김성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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