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달맞이언덕의 안개] 14. 피와 모래, 그리고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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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수평선 위에는 뒤엉킨 구름 띠가 길게 깔려 있었다. 그 위로는 푸른 하늘이 있었고, 하늘의 중간쯤에서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넘실대는 코발트 빛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요트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유행가를 크게 틀어 놓고 오륙도 쪽으로 가고 있는 유람선 꽁무니에는 갈매기 떼가 군무를 이루며 따라가고 있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모래밭은 벌거벗은 사람들로 짓이겨져 있었고, 바닷물 속에서 첨벙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해류를 타고 몰려온 물개 떼처럼 보였다. 물가에서 안쪽으로 조금 떨어진 드넓은 모래밭은 온통 울긋불긋한 파라솔로 뒤덮여 있었고, 그것들은 햇빛을 피해 몰려든 사람들로 빈자리 하나 없이 채워져 있었다.

나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엉덩이에 모래를 묻힌 채 왔다 갔다 하는 비키니 차림의 젊고 발랄한 여자들을 음험한 눈빛으로 훔쳐보기도 하고,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마치 내가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이 거기에 있기라도 하는 듯 아득한 눈길로 수평선 쪽으로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사람이 죽었어요" "외국 여자예요"
두 여자가 잇따라 말했다
외국 여자가 하필이면 왜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죽었을까?
나는 샌들을 벗어 들고 모래밭을 가로질러 갔다


한 시간쯤 지나자 북쪽으로부터 새로운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수평선 위에 머물러 있는 긴 구름 띠와 금방 뒤엉켜 두꺼운 층을 이루면서 바닷가 쪽으로 다가왔다. 하늘은 금방 어두워졌고, 비가 올 듯 우중충해지더니 비 대신 달맞이언덕 오른쪽, 바다를 가리고 있는 돌출부 밑으로부터 희끄무레한 것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해수욕장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두껍고 진한 색깔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이미 바다 안개가 되어 바닷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달맞이언덕을 뒤덮고 있는 안개는 밑으로 내려오다가 중간에 멈춰 있었고, 그 아래로 숲과 언덕을 잠식한 아파트들이 난개발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가 해안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다시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바다 안개는 어느새 모래밭을 휘감고 있었다.

미포 쪽 가까운 해수욕장 왼쪽에 사람들이 몰려 서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호기심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구경꾼들 틈에서 수영복 차림의 젊은 여자들 서너 명이 떨어져 나와 모래밭을 가로질러 호안 도로 위로 올라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재잘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는 사람들이 몰려 서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이 죽었어요."

"외국 여자예요."

두 여자가 잇따라 말했다. 외국 여자라는 말에 나는 부쩍 호기심이 일었다. 외국 여자가 하필이면 왜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죽었을까? 나는 샌들을 벗어 들고 모래밭을 가로질러 갔다. 그곳에는 경찰은 보이지 않고 구경꾼들만 잔뜩 몰려 있었다.

죽은 여자는 금발이었는데, 모래밭에 파묻혔다 나온 듯 머리칼은 모래와 뒤엉켜 있었다. 얼굴 위에도 모래가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고, 더구나 모래가 묻어 있는 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하체 쪽만 모래 속에 묻혀 있었고 상체는 모래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몸뚱이 전체가 모래에 덮여 있던 것을 누군가가 상체 쪽만 모래를 걷어 낸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안개가 시신을 쓸고 지나갔다. 잠시 후 새로운 안개가 다가와 슬픈 듯 시신을 어루만졌다. 안개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순찰대원으로 보이는 젊은 경찰 두 명과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사복 차림의 사내가 나타난 것은 30분쯤 지나서였다. 사복은 바로 곰처럼 생긴 형사였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아, 산책 나왔다가…."

곰은 이미 시신을 처음 발견했다는 마흔쯤 돼 보이는 사내 쪽으로 가고 있었다. 사내가 곰에게 하는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뛰어가는데 뭐가 물컹하더라고요. 그래서 헤집어 봤더니 사람 몸뚱이가 만져지더라고요. 보통 모래찜질을 하면 얼굴은 내놓잖아요. 그런데 얼굴까지 모래에 덮여 있었어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모래를 헤쳐 봤더니 여자가 죽어 있더라고요. 더구나 외국 여자가 말이에요. 깜짝 놀랐어요."

온몸이 새카맣게 그을린 사내는 검은색 삼각 수영복으로 중요 부위만 살짝 가리고 있었는데, 말끝에 소름이 끼친다는 듯 어깨를 조금 떨다가 말았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완전히 모래 속에 묻혀 있었는데 당신이 이렇게 얼굴과 상체에 덮여 있던 모래를 치워 냈다 이 말이군요?"

"네, 그렇죠.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해야 할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시신을 보려고 서로 밀치면서 몰려들자 곰은 순찰대원들에게 빨리 폴리스라인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구경꾼들 틈에 끼어서 노란선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곰이 나를 불러 주는 바람에 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마침 작가님이 오셨으니까 추리력을 한 번 발휘해 보십시오. 보시다시피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북적대고 있는 해운대 해변에서, 그것도 대낮에 외국 여자가 죽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고, 보기 드문 사건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인 같은데요. 그것도 아주 교묘한…."

"왜 그렇게 보십니까?"

"스스로 모래 속에 들어가 죽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이 자기 얼굴을 모래로 덮을 수는 없죠."

"그렇군요. 그런데 왜 교묘하다는 거죠?"

"보통 살인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발생하는데 이건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는 해수욕장에서 대낮에 버젓이 일어났어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일어난 겁니다. 역발상이죠.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피부가 싱싱한 것으로 봐서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곰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면장갑을 끼더니 나한테도 면장갑을 하나 건네면서 "바쁘시지 않으면 좀 도와주시겠습니까?"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에는 자기를 도와줄 인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곰을 도와 시신 위에 덮여 있는 모래를 대강 걷어 냈다. 본의 아니게 시신을 만지게 돼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 셈이어서 적잖게 흥분한 상태에서 시신을 만지고 관찰했다.

안경을 걷어 내자 비로소 얼굴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는데, 20대의 젊은 여자로 지저분한 상태에서도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그런 얼굴이었다. 동그랗게 뜨고 있는 녹색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선이 분명한 육감적인 입술은 조금 벌어져 있었다. 그녀는 노란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누워 있는데도 젖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엄청나게 큰 가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뚱이를 살피던 곰이 나를 가까이 부르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왼쪽 겨드랑이 밑에 상처가 보였고, 그 밑으로 흘러내린 피가 모래를 적셔 놓고 있었다. 피는 멈춰 있었고, 흘러내린 핏자국은 굳어 있었다. 안개 때문인지 핏자국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바로 심장 밑을 찔렀군요."

내 말에 곰은 끄덕였다.

"깊이 찔렀네요. 심장 밑에서 위쪽으로 깊이 찌른 것 같아요."

"이렇게 심장을 깊이 찌르면 아무 소리 못하고 즉사하지 않나요?"

"끽소리 못하고 죽죠. 찌른 다음 모래로 덮어 버린 모양이에요."

그 밖에 다른 상처는 없는 것으로 보아 피살자는 흉기에 심장이 찔려 사망한 것 같았다. 부검을 해 봐야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지만 대강 살펴본 결과는 그런 것 같았다.

어디선가 몇 번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죽은 여자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내 시선이 멎은 곳은 그녀의 왼쪽 어깨였다. 어깨 위에는 푸른 도마뱀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 문신을 본 곳은 달맞이언덕에 있는 펍에서였다. 비로소 나는 그녀가 그 펍에 드나들던 여자란 것을 알아보았다. 몇 번 본 적이 있고 인상적인 여자였기 때문에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인상적이란 것은 엄청난 크기의 젖가슴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왼쪽 어깨에 도마뱀 문신을 한 여자는 한 명이 아니고 두 명이었다. 똑같이 푸른 도마뱀 문신을 한 그들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안개를 헤치고 죽은 여자가 드나들었던 그 펍에 가 보았다. 그곳에 가 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펍은 카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그대로 인수해서 펍으로 바꾼 것이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마리의 매춘과 사기 사건으로 한 바탕 홍역을 치른 후 새 주인이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생맥주를 주로 파는 펍 형태로 다시 문을 열었던 것이다.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값싼 생맥주 위주로 나가자 소문을 듣고 외국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오는 술집에는 으레 한국인들이 오기 마련이다. 그것도 남자들보다는 여자애들이 찾아온다. 여자애들은 외국 남자들과 사귀고 싶어 오는 것이고, 그것을 알고 있는 외국 남자들은 그들 앞에서 꼬리를 치는 여자애들을 손쉽게 낚아챈다. 펍에 드나드는 외국인들은 공단이나 원전 같은 데서 일하는 기술자들도 있지만 거의가 원어민 강사들이다. 그들이 값싼 술집에 몰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적은 돈으로 가볍게 한 잔 걸칠 수 있는데다 펍 외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펍이야말로 외국 생활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잠시라도 달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은 별일이 없으면 팝을 찾는 것이다.

밤 9시 조금 지난 시간이었고, 실내는 절반쯤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지 않고 바의 구석진 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바의 중간 자리는 비어 있었고 저쪽 끝에 검정 운동모를 눌러쓴 젊은 사내가 혼자 앉아 있었다. 30대 총각인 바텐더가 내 쪽으로 다가오자 나는 마티니를 한 잔 주문한 다음 슬쩍 물어보았다.

"여기 출입하던 외국 아가씨가 죽은 거 알고 있어요?"

"메리 말이군요. 참 안 됐어요. 참한 아가씨였는데…."

"벌써 소문이 퍼졌나요?"

"해변에서 외국인들이 메리를 알아보고 경찰에 신고한 모양이에요."

"어느 나라 아가씨였죠?"

"캐나다 몬트리올인가, 거기서 왔다고 했어요."

"경찰이 여기 왔었나요?"

"네, 조금 전에 다녀갔습니다."

말상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바텐더는 코밑수염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왼쪽 가슴에는 Jack이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있었다. 외국인 손님들이 많다 보니 그들이 부르기 쉽게 아예 영어 이름을 하나 임시로 지은 것 같았다. 그는 돌아서려다 말고 물었다.

"메리가 죽은 걸 어떻게 아시죠?"

"해변에서 봤어요. 죽어 있는 걸…."

새로 외국 손님 두 명이 바에 다가섰기 때문에 잭은 그쪽으로 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의 오른쪽 끝에 검정 운동모를 푹 눌러쓰고 있는 젊은 사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생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나처럼 혼자 앉아 있었다. 풀어헤쳐진 반팔 검정 남방 사이로 드러난 가슴은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고, 그 위에는 조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쏘아보고 나서 급히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내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떨어 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그것을 꺼내 귀에다 갖다 댔다. 그리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나서 "잘 알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하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나는 범인이 메리를 죽이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범인이 메리에게 모래찜질을 해 주겠다고 하자 메리는 좋다고 한다. 두 사람은 열심히 모래를 파헤쳐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구덩이를 만든다. 메리가 그 안에 눕자 범인은 그녀의 몸 위로 모래를 덮는다. 얼굴만 남기고 모두 덮고 나자 범인은 메리가 보지 못하게 그녀의 얼굴 위에다 모자를 올려놓는다. 아니,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는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은 별스러운 짓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다. 범인은 날카로운 칼을 꺼낸 다음 한 손으로 메리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마치 애정행위를 하는 것처럼 상체를 포갠다. 그와 동시에 칼로 심장 밑을 찌른다. 밑에서 위로 심장 깊숙이 칼을 밀어 넣는다. 메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르르 떨다가 숨을 거둔다. 범인은 모자 또는 수건을 걷어 내고 그녀의 얼굴을 모래로 덮는다. 안경을 빼낼까 하다가 그대로 두고 모래를 덮는다. 그런 다음 모자 또는 수건을 다시 그 위에 올려 놓는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누군가가 모래 속에 누워서 잠든 것처럼 보인다. 범인은 주위 사람들이 떠나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주위에서 사람들이 떠나자 범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모자 또는 수건을 집어 들고 그 자리를 떠난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잭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티니 한 잔을 또 주문했다. 그리고 그가 마티니를 가져오자 물었다.

"메리는 어떤 여자였어요? 캐나다 아가씨가 여기까지 와서 죽다니 정말 안됐어요."

"메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는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담배를 꺼내 물자 그는 재빨리 라이터 불을 붙여 주었다.

나는 5만 원 권을 꺼내 그 앞으로 내밀었다.

"메리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줘요."

잭은 그것을 힐끗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챙겨 넣으면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메리는 레즈비언이었어요."

상대는 제인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어깨에 메리처럼 도마뱀 문신을 한 원어민 강사였다. 그녀는 호주 출신이었다. 내가 기억하기에 그들은 항상 붙어 있었다.

"제인은 오늘 여기 오지 않았나요?"

"요즘은 안 와요. 메리와 제인이 심하게 싸웠는데, 그 뒤로 제인은 펍에 오지 않아요."



며칠 후 밤이 깊어 내가 '죄와 벌'에 앉아 안개와 함께 시칠리아 산 와인을 음미하고 있는데 연락도 없이 곰이 나타났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비싼 양주를 한 병 내놓았다.

"바텐더가 맞나요?"

"네, 자백했습니다."

그날, 그러니까 해변에서 메리의 피살체가 발견되던 날 나는 곰과 헤어져 늦게까지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다녔었다. 그 결과 메리는 여자가 아닌 남자와 단둘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외국 남자가 아닌 한국 남자와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파라솔 업자에게 파라솔을 빌리지 않고 개인 파라솔을 가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펴 놓고 밀회를 즐긴 것 같았다. 나는 목격자들에게 그 남자의 인상까지 꼼꼼히 물어보았는데 물론 공짜로 물어본 것은 아니고 만 원짜리 두어 장씩을 쥐여 주고서야 얻어들을 수가 있었다.

메리를 살해한 방법은 여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런 대담한 방법은 남자가 아니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심장을 겨누고 찔렀다는 것은 전문가나 경험이 있는 자의 소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해변에서 메리의 시체가 발견되던 날 저녁 내가 펍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들렀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낮에 해변에서 메리와 함께 앉아 있던 남자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다고 자신한 목격자 한 명을 데리고 펍에 갔던 것이다. 그 목격자는 얼굴이 까맣게 타고 목에 조개 목걸이를 걸고 있는 치킨 장수로 여름 한철 해수욕장을 돌아다니며 양념치킨을 파는 사내였는데 메리와 한국인 남자에게 치킨을 팔았기 때문에 그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쁘다는 치킨 장수에게 10만 원이나 주고 그를 펍에 데려갔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따로따로 안으로 들어갔고, 서로 모르는 체 떨어져 앉았는데 들어간 지 10분도 안 돼 치킨 장수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 지금 밖에 나와 있습니다. 영감님 맞은편에서 술 팔고 있는 코밑수염 기른 남자가 바로 그놈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알아봤습니다. 확실합니까? 확실하니까 믿으세요. 저 바빠서 갑니다.

"폭력과 강도, 강간 전과가 다섯 개나 있는 자예요."

내가 따라 준 와인을 마시면서 곰이 말했다.

"왜 메리를 죽였죠?"

"메리하고 한 달쯤 동거를 했는데 메리가 헤어지자고 하면서 짐을 싸들고 나간 모양이에요. 메리한테 새 애인이 생긴 걸 알고 놈은 그냥 헤어질 수는 없으니 마지막으로 해수욕장에서 수영이나 하자고 꼬인 것 같아요. 이별 파티 같은 그런 거겠죠. 그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모래찜질을 해 주는 척하면서 여자를 죽인 거죠. 죽이고 나서 놈은 태연히 펍에 출근했습니다. 아주 잔인한 놈입니다."

부검 결과 메리의 혈액에서는 다량의 히로뽕 성분이 검출됐는데 잭한테서도 같은 성분이 나왔다고 했다. 메리는 마약에 취해 모래 구덩이에 누워 있었고, 잭은 마약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그녀를 살해한 것 같다고 곰은 말했다.

"메리는 레즈비언이 아니었나요?"

"제인과 친하기는 했지만 동성애자는 아니었습니다. 잭이 제인한테 혐의를 씌우려고 지어낸 말입니다. 그 아가씨는 메리가 살해되기 일주일 전에 이미 출국했더군요."

곰이 가고 나자 포가 내 곁으로 가만히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말썽이 끊이지 않네요."

"글쎄 말이야. 상호가 안 좋은가."


김성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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