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 전남 구례 산동면 산수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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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물감을 뿌렸나… 가지마다 차조알 같은 노란 꽃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마을 중 한 곳인 상위마을. 봄을 맞은 마을의 집과 돌담, 계곡이 온통 노란 빛으로 물들었다.

지리산 만복대. 복(福)이 많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어떤 복인지 몰라도 적어도 봄날엔 확실한 복을 받는다. 봄이면 그 아래 첫 마을은 모든 산이 탐내는 노란빛으로 그득하다. 고목 가지마다 차조알 같은 노란 꽃이 봄빛으로 자글거린다. 정두리 시인 말마따나 봄 햇살이 씨앗을 뿌렸다. 나무 그늘도 노랗고, 돌담에 낀 이끼마저도 노랗다. 이리저리 난 고샅길은 온통 노란 봄이다. 구례 산동면 산수유마을. 65년 전 여순사건의 상처를 간직한 땅이 올해도 어김없이 노란 꽃사태다. 아득한 핏빛 기억 씻을 듯, 흐드러진 산수유꽃 무리는 그래서 서럽고 더 아름답다.

■상위마을

섬진강변에 매화가 만개할 무렵, 지리산 자락에선 산수유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다. 구례의 봄은 그렇게 활짝 핀다. 전국 산수유 생산량 70%를 책임지는 구례에서도 산동면, 그 산동면에서도 산수유 군락으로 이름이 높은 땅이 해발 480m에 위치한 상위마을이다. 산수유나무 2만 7천여 그루가 빽빽하다. 저절로 자라기도 했고 사람 손이 닿기도 했다. 산수유나무에 푹 파묻힌 마을 군데군데 고로쇠나무가 처량할 지경이다.

여순사건·한국전쟁 겪은 상위마을
인적 끊긴 집터에도 나무만 무성

요란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현천마을
호젓하게 산수유 감상하기엔 적격

사성암 움켜잡고 있는 오산
오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터

"산수유꽃 피니 봄이지." 상위마을에서 나고 자란 구형근 어르신 말이다. 꽃은 10일께 폈다. 지난달까지는 꽃망울이 온기와 냉기에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앞으로 20일, 내달 중순까지 꽃 천지다. 그 후엔 노란 가루를 땅에 흩뿌려 소리 소문없이 문득 제 봄을 마감한다. 매화의 절정이 낙화라지만 산수유꽃은 그렇지 못하다. 산수유나무는 꽃 져 여름이고 열매가 발그레 익어야 가을이다. 마을의 가을은 벌겋게 달뜬다. 그때는 열매 체험축제로 또 한 차례 동네가 들썩인다.

산수유나무를 일러 대학나무라 한다. 세 그루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 보낼 정도로 돈이 됐다. 늦가을 수확한 열매는 강정제나 강장제로 쓰인다. 이런 상위마을은 땅도 비옥해 가난하지 않았다. 한때 130여 가구가 도란도란 살았다. "이젠 채 30가구가 안돼." "사람들이 기름진 고향을 왜 떠났죠?" "그 있잖은가, 여순사건…." 무심코 던진 질문에 어르신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리산 자락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묻지 말라 했다. 금기를 떠올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반란군이 토벌군을 피해 산동면 쪽으로 몰렸다. 산 깊고 물 좋은 골짜기니 그랬겠다. 상위마을 피해가 유독 컸다. 반란군은 밤에 민가로 내려와 밥 먹고 마을 사람을 시켜 양식을 산으로 옮겼다. 반항하면 사살했다. 토벌군은 또 그들대로 마을을 가혹하게 다뤘다. 반란군을 도운 혐의를 씌웠다. "마을과 학교가 불탔지." 여순사건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35명이 희생됐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19살 처녀가 남긴 '산동애가'는 그 시절의 비가(悲歌)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열아홉 꽃봉오리 피어 보지 못한 채로/(중략)/살기 좋은 산동 마을 인심도 좋아/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까마귀 우는 골에 나는야 간다/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하략)'

여순사건이 잠잠해지자 이번엔 한국전쟁이 터졌다. 퇴각하던 북한군이 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화를 입었다. 연이은 난리통에 마을은 위축됐고, 인적 끊긴 집터엔 산수유나무가 무심하게 자라고 또 우거졌다. 그리고 겨울바람이 지리산을 넘어가는 3월, 마을은 해마다 색 고운 봄 서정이 넘실댄다. '산수유꽃 노랗게 흐느끼는' 박목월 시인의 봄이 이렇지 싶다.

산수유꽃터널 돌담 길.
"돌담 길은 꼭 둘러봐야지, 사랑이 찾아올지 모르거든." 어르신이 앞장섰다. 돌담은 아늑했다. 허리춤을 넘을락 말락한 높이가 편안하고, 여기저기 산기슭에서 가져온 돌로 질박하게 쌓은 품이 따뜻하다. 길 양쪽 산수유나무가 만든 꽃터널은 여행객을 노랗게 물들였다. 노란 수채화 물감을 분무한 세상이 이럴테다. 봄바람이 살랑이더니 설?Т? 첫사랑이 저만치 웃다 가버린다. 잘 지내고 있겠지.

■현천마을

산동면은 상위마을 말고도 적잖은 산수유마을을 보유했다. 상위마을 그 아래쪽으로 하위마을, 너럭바위와 계곡으로 출사객 붙드는 대평·반곡마을, 송원리조트 뒤편 사포마을…. 이들 마을의 홍보관 격인 산수유문화관에서 안내도를 챙기는 게 좋겠다. 그 뒤편 산수유사랑공원에 올라 일대 마을 전경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상위마을에서 계척·현천마을로 향했다. 차로 20분쯤. 원촌교 지나 산동면사무소가 나오면 19번 국도 쪽으로 차머리를 돌린 후 노면과 표지석을 찬찬히 살피면서 운전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도착한다. 계척마을엔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나무가 있다. 1천 년 전 중국 산동성 처녀가 이 마을로 시집 오면서 가져왔단다. '할머니 나무'로 불린다. 전설일 뿐이다. 문헌 기록은 없다. 여하튼 구례군은 2000년 계척마을을 시목지로 지정, 산수유꽃축제 열리는 날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호젓한 풍경이 좋은 현천마을.
현천마을은 호젓하게 산수유꽃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담한 저수지가 산수유꽃과 양철지붕, 허름한 돌담과 어우러져 그림같다. 요란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해서 더 마음이 가는 곳이다. 산수유꽃 무리도 숨막히기보다 왠지 개나리의 올망졸망함에 가깝다. 그래선지 상위마을의 봄이 철렁 왔다면, 현천마을의 봄은 은근하고 수줍게 '봄이잖아요'를 속삭인다.

저수지 옆에서 강정 팔던 어르신이 마을 꽃을 닮아 있었다. "부끄럽게 이름 알아 뭐하려구, 박영순이야, 스물한 살 먹었을 때 저 아래 동네 문척면에서 시집왔어, 나이 얘기는 그만 둬, 허허, 육십아홉이야, 저수지 만들 때 흙이며 돌이며 이고 날랐지, 40년쯤 됐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어여 이거나 한번 먹어봐, 쌀과자야, 이건 몸에 좋은 현미과자고, 우롱차도 한 잔 잡숴, 큰 인심은 아니지만 맛은 괜찮아. 조심해서 내려가." 순박한 인정은 넉넉했고 푸근했다. 어르신 신문에 이름 나갑니다.

■주변 둘러볼 곳

꽃구경 끝내고 사성암에 들렀다. 부산 가려면 순천완주고속도로 황전IC에 진입해야 한다. 그 길목에 사성암이 위치한다. 해발 530m 남짓의 오산 정상이다. 사성암은 기암절벽에 박힌 듯 달려 있다. 기묘한 기운이 보는 이를 붙든다. 기도처로 유명한 화엄사 말사다. 소원바위로 이름을 바꾼 뜀바위, 도선국사 수행처였던 도선굴, 원효대사의 작품이라는 마애여래입상 등 눈이 바쁘다.
오산 절벽에 달려 있는 듯한 사성암.
하지만 사성암의 백미는 따로 있다. 절집을 꽉 움켜잡고 있는 오산이다. 발 아래로 섬진강은 구례 들녘을 굽이치고, 맞은 편에선 천왕봉 앞세운 지리산이 달려든다. 구례를 일러 '삼대삼미(三大三美)의 고장'이라 했다. 지리산, 섬진강, 평평한 들은 크고 경관, 소출미, 인심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사방 트인 오산 꼭대기에서 구례 삼대(三大)를 제대로 누렸다. 문화해설사 이명옥 씨 말이 틀리지 않다. 오르지 않으면 후회하고, 두 번 다시 가지 않으면 후회하는 산. 오산 오르는 수고를 아끼지 마시라.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ilbo.com


TIP

■구례 산수유꽃축제

올해로 15회째다. 오는 30일까지 산동면 지리산온천 관광지 일대에서 열린다. 29일 7080하모니 콘서트, 30일 산수유 포에버 콘서트와 대한민국 명창초대전이 준비됐다. 행사 기간 중 산수유두부·초콜릿 만들기, 산수유압화체험, 전통 놀이체험 등이 계속된다. 구례군축제추진위 전화 061-780-2726~7. '내비' 주소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825.

■교통

자동차:남해고속도로~순천JC∼순천완주고속도로~구례 화엄사IC(우회전)~용방교차로(좌회전)~산동교차로(우회전)~구례 산수유마을.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구례공영버스터미널(061-780-2731)까지 3시간 걸림. 1일 10회 운행, 오전 7시~오후 6시. 요금 1만 5천200원. 구례공영버스터미널에서는 중동 방면 버스를 타면 된다. 요금은 2천100원. 30~40분 걸림. 열차는 부전역~순천 행을 이용한 뒤 순천에서 구례 방면으로 갈아 탄다. 부전역~순천 행은 하루 4편(오전 6시 10분, 8시 18분, 10시 35분, 오후 1시 5분 출발). 요금 1만 2천500원. 순천~구례 행은 오전 5시 30분부터 약 1시간 간격으로 운행. 요금 2천600원. 임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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