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1. 삶과 죽음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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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밀어낸 도시, 삶의 가치도 망각한 건 아닐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문현동 안동네'. 250채 300여 세대가 사는 이곳에는 지금도 수십여 기의 무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다. 김경현 기자 view@

과거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은 산업화·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는 부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잊고 지내거나 잃어버렸다. 2014년 부산. 지금 우리는 되묻는다. 잊고 지낸 그 소중한 자산을 하나하나 되찾아 찌든 우리의 삶을 살찌우자고. 이에 본보는 부산·경남의 유적이나 마을 등에 깃든 이야기를 통해 그 소중한 자산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해운대 센텀시티와 마린시티로 대표되는 고층빌딩들. 부산은 분명 마천루의 숲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묘지마을, 벽화마을, 돌산마을…. 부산의 대표적 산동네요, 달동네인 '문현동 안동네'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 마을의 역사는 다소 흐릿하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부터 공동묘지였으나 6·25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묘지 사이 빈터에 집을 지으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밖 사람들은 이곳을 묘지마을이라 불렀다. 그게 마을 이름의 시작이었다.

2008년, 이 마을은 크게 변신한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실시로 마을 담벼락이 화사한 파스텔 톤의 그림으로 채워졌다. 그걸 계기로 벽화마을이라 불린다. 이듬해는 국토해양부의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범 사업에 당선돼 마을 산등성이의 '돌산공원'이 멋지게 꾸며진다. 이때부터 돌산마을이 됐다.

80여 기 무덤 있는 문현 안동네
묘비 이용 건축 아미동 비석마을
산업화로 '죽음의 공간' 소멸


그러나 마을 이름의 이 같은 변화에도 변함이 없는 게 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공존이다. 문현동 안동네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곳이다.

그랬다. 지난 3일 오후 문현동 안동네. 250채 300여 세대가 사는 이곳에는 지금도 80여 기의 무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봉분의 3분의 1을 길로 내어 준 무덤도, 봉분 주변을 적벽돌로 빙 둘러 아름답게 장식(?)한 무덤도 있었다. 어느 무덤은 수풀이 무성했지만, 또 다른 무덤은 깨끗하게 벌초를 했다. 마치 도래솔처럼 조그마한 나무가 빙 둘러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무덤 앞에는 작은 편백 두 그루가 무덤의 입구를 알리며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무덤은 골목, 집 뜰과 현관, 장독대, 마을 산등성이에도 있었다.

"여기로 이사 올 때만 해도 무덤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죠. 무덤 중 상당수는 자손들이 찾지 않는 것도 있지만, 개중에는 자손들이 찾아와 매년 벌초, 성묘하고 가는 곳도 있지요." 이 마을에서 산 지 26년쯤 된다는 황창석(61) 씨의 말이다.

마을에 흩어져 있는 무덤은 그나마 묘비라도 서 있으면 다행이다. 대다수 무덤은 이조차 없다. 봉분은 흔적도 없이 묘비만 덩그렇게 집 벽면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묘지의 비석이 계단이나 담장을 만드는 건축 자재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는 서구 아미동 '비석 마을'. 정달식 기자
삶과 죽음의 공존은 '아미동 비석마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를 헐고 비석을 건축자재 삼아 형성한 마을이 비석마을이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 무덤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비석이 담벼락이나 계단으로 사용돼 그 흔적을 얘기한다.

오래지 않은 옛날, 문현동 안동네나 아미동 비석마을처럼 죽음은 우리의 삶과 늘 가까이 있었다. 동네 주변,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 늘 무덤이 있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은 "40~50년 전만 해도 차이나타운이나 센텀시티 근처에 묘지가 많았다. 하지만 산업화 물결 속에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느 순간 죽음의 공간은 하나둘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갔다"고 말했다.


■일상 속 죽음이 갖는 의미

죽음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문화 평론가 이지훈(필로아트랩 대표) 씨는 "죽음의 성찰은 습관적 삶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계기이다.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삶의 유한함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살아가는 현재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죽음이 갖는 소중함을 간과했다. 부산대 영문학과 김용규 교수는 "어느 순간 죽음의 존재를 우리의 일상에서 쫓아내 버리고, 멀리하고, 도외시했다"고 지적했다. 산업화 물결이 주범이었다.

죽음을 깎아내리는 문명은 병든다. 죽음을 외면하려는 문명은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감각을 자극하는 문화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고대 로마문명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고대 로마문명은 죽음 대신 '용감함'의 미덕을 내세웠다. 그것은 거대 제국을 향한 야망과 정복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용감함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외면 또는 망각한 것이었다.

죽음 깎아내리는 문명은 병들어
일본·홍콩은 도심 속에 공동묘지
물신주의 정화 장소로 활용해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직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김 교수는 "그동안 죽음을 애써 외면하거나 망각해 왔다면, 이제 우리는 이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까이 일본만 하더라도 시내에 묘지가 있다. 홍콩에만 가도 도심 속, 호텔 옆에 공동묘지가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중남미 도시들은 대부분 도심에 공동묘지를 가지고 있다.

멕시코의 경우 동네마다 공동묘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곳은 집으로 가는 길에도 있고, 공원에도 있고, 집의 창 밑에도 있다. 산 사람 곁에 죽은 사람의 집이 있지만, 죽은 자의 집이 산 자의 집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와 다른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죽음은 욕망을 경계(警戒)하는 죽비

건축가 승효상은 "일상생활 공간에 묘지가 없어서 도시가 경건하지 못하다. 죽은 자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산 자에게 삶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묘지가 도시 안에 함께 있어야 삶이 경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도처에 물신주의의 망령이 꿈틀대는 도심 속에, 그래도 이를 끊임없이 정화하는 장소가 묘지라는 것이다.

죽음이 없는 삶은 세상에 없으며, 삶이 없는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무시한다는 것은 삶을 무시하는 것. 삶의 참된 가치를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은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며,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동안 추구했던 경제(성장)지상주의, 혹은 지나친 집착과 경쟁은 어쩌면 죽음을 외면하는 문화가 낳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집값의 하락만을 걱정하는 천박한 물신주의는 죽음의 형식을 우리 주변에서 내쫓아 우리의 도시에서 경건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산업화 물결로 잃어버리고 살았던 죽음의 가치와 의미를 일상으로 가져와야 한다. 늦지 않았다.

온갖 욕망과 집착의 틀에 갇힌 현대 도시의 사람들. 그 곁에 묘지(죽음)가 있다면 그 욕망을 경계(警戒)하는 죽비가 될 수 있을 터이다.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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