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2005년 국회 목욕탕, 권오을과 이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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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일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

2005년 여름이었다. 경북 안동 출신 한나라당 국회의원 권오을과 전북 남원 출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이강래가 국회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몸을 담그고 있었다. 나이는 이강래가 권오을보다 많지만 둘 다 여야에서 알아주는 실력파 의원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탕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지방자치제도 개정 협상 테이블을 잠시 접고 머리를 식히자는 취지였다.

기초선거 합의안, 지금은 빛바래 재구성해야

골치 아픈 문제는 사실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일정한 합의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그림'을 각자의 당에 가지고 가서 설득하는 것이 문제였다. 지방정치 발전에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던 두 젊은 정치인들의 구상은 논란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둘 가운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소리쳤다. "에이, 한 번 저질러 봅시다." 각 당의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 통 큰 결단을 하자는 것이었다. 두 정치인이 각자 자기가 속한 당에서 제기되는 논란을 돌파하며 합의, 관철시킨 '그림'이 (1)기초의원 유급제 (2)중선거구제 (3)정당공천제 등이었다. 기초의원 유급제는 지방정치인 출신 권오을이, 중선거구제는 이강래가, 정당공천제는 양측이 함께 내세운 것이었다.

그 후 두 차례의 지방선거가 있었고, 또 하나의 지방선거가 내년으로 다가오고 있다. 권오을, 이강래가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 들어 올렸던 깃발은 어떻게 되었나? 그것들은 지금 빛이 바랜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첫 번째, 기초의원 유급제는 유능한 일꾼의 지방의회 진출을 촉진하여 지방의회의 집단적 지능을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초의회에 매겨진 점수는 참담하다. 기초의회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두 번째, 기초의원 중선거구제도는 1개 선거구에 2~4명의 선출을 통하여 지역주의 구조를 완화하고, 소수파 정치세력의 기초의회 진출을 촉진하며, 특정 정당의 지역 권력독점을 완화하기 위해 도입했으나 그 영향은 미미했다. 소선거구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세 번째,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는 책임정치를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에 예속시켰고 공천과 관련된 각종 추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역주의 투표와 결합해서 한 지역 내에 특정 정파의 싹쓸이를 낳았다. 그래서 지금 정당공천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여론이 70% 정도에 이른다.

이제, 권오을-이강래가 만든 제도를 출발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제도이든 지고지선의 것은 없다. 모든 제도는 어떤 시점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지방정치의 문제는 무엇일까? 나는 지방정치의 자율성과 다양성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는 폐지되는 것이 마땅하다. 정당공천제를 유지하면서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방정치의 자율성을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면 지역토호의 발호가 염려되며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는 묻힐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내가 보기에 그런 주장은 기우이다. 정당공천이 폐지되면 개방성이 늘어나서 새로운 인물들이 더 많이 지방의회로 진출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기초자치 정당공천제 폐지·중선구제 유지를

그리고 기초의원 중선거구제는 정치적 다양성 실현이라는 점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걱정이다.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자거나 중선거구제의 취지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일이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대구에서는 대구시기초의회선거구획정위원회가 기초의회 4인 선거구 11곳을 모두 2인 선거구로 바꿔 의결한 바 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 두 차례의 지방선거에서는 선거구획정위원회가 만들어 놓은 4인 선거구를 광역의회가 조례로 만들면서 2인 선거구로 나누어 버렸는데 이번에는 선거구획정위원회 단계에서 4인 선거구 나누기가 일어났다. 놀랍다. 4인 선거구야말로 중선거구제의 취지를 잘 실현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그것을 살려내야 한다.

2005년 여름 국회 목욕탕에서 권오을, 이강래가 합의한 세 가지 과제는 지방정치의 자율성과 다양성이라는 현재의 문제의식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이 말은 당시 목욕탕 합의를 이끌어냈던 권오을, 이강래가 나에게 한 얘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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