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낭만파 남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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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르의 어색한 동거

낭만파 남편의 편지. 리얼곤시네마또 제공

좋은 소설이 좋은 영화가 되기 어려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작품이란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극히 드문 찰나에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 순간 거의 기적이나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세계를 옮기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의미나 내용만을 차용해 온다면 굳이 다른 장르로 바꾼 이유가 없을 테고 그렇다고 형식을 모사하는 데 열중하다 보면 그저 흉내 내기에 그치기 십상이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 여기에 비하면 각색 과정의 까다로움은 그저 단편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아쉽게도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각색 작품이 피해야 할 함정을 고스란히 답습한 영화다.

반복되는 일상과 권태 속에 매일을 버텨 나가는 부부가 있다. 불타올랐던 사랑의 감정은 이미 기억 속에 묻혀 버렸고 하루하루가 심심하고 고단하기만 한 두 사람. 남편은 잃어버린 애정의 감정을 되찾고자 아내에게 익명으로 연애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아내는 설마 남편이 보낸 편지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익명의 편지가 되살려 준 설레는 감정을 만끽한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이상하게 꼬인다. 아내의 반응을 본 남편은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을 엿보며 상대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 싶은 의심에 빠지고, 낭만적인 상상으로 시작된 편지가 쌓여 갈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의심과 회의는 커져만 간다.

고 박철수 감독의 마지막 작품
편지가 빚은 부부의 의심과 회의
소설·연극·영화의 불편한 접합

고 박철수 감독의 마지막 기획 작품이자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안정효 작가가 쓴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소설, 연극, 영화를 형식적으로 접합시키려 한다. 우선 동일한 표현의 반복을 통해 독자를 끌어당기는 소설의 기법을 활용, 내레이션을 통해 영화의 큰 맥락을 제시해 주고 연극적 요소를 도입해 13평 남짓의 소극장 무대에서 모든 사건을 처리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영화를 통해 구현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 가지 요소 어느 것도 효과적으로 살리진 못했다.

얼핏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을 연상시키지만 연극이라는 형식 안에 강렬한 시대성을 녹여 냈던 '도그빌'과는 달리, '낭만파 남편의 편지'의 경우 연극적인 무대만 빌려왔을 뿐 사건을 이어 나가는 방식은 평범한 상황극과 별반 차이가 없다. 소설의 문체를 활용한 내레이션 역시 지나치게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듣는 것, 보는 것 어느 쪽도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

적은 예산과 짧은 촬영 회차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짐작되지만 형식과 내용이 이만큼 엇나가면 그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매체에 대한 이해 없는 물리적 결합으로 연극, 소설, 영화의 장점을 깎아 먹은 안타까운 사례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설정과 출발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부부의 압축된 관계, 아이러니한 상황설정 등을 통해 문제의 본질은 비교적 효과적으로 인지된다. 그만큼 무리한 형식적 실험이 아쉽다.12일 개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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