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 썰물] 자연의 큰 그림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인디언 기우제는 실패한 적이 없는 '불패 신화'다. 몇 달도 좋이 비가 내릴 때까지 쉬지 않고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이다. 쉼 없는 인간의 갈망 너머에는 때가 되면 비를 뿌리는 자연의 큰 모습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0여 일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제주도에서 지난 18일 서귀포시장이 기우제를 올렸다. 그런데 웬 영문인가. 다음 날 단비가 한때 내렸다. 이런 기분 좋은 우연이 일견, 자연을 향한 인간의 오랜 불패 신화를 만드는 것 같다.

곳곳에서 대형 유리창을 깰 정도의 폭염이 지독스레 지속됐다. 서울에서 유리 파편에 초등생 5명이 다쳤다. 유리에 섞인 불순물인 황화니켈이 이상 팽창했다나. 유리도 더위를 먹어 갈라진 것이다. 부산과 남부지방, 제주도에서 지난 23일부터 이틀, 사흘간 반가운 비가 왔다. 40일 이상 바싹 메마르면서 참, 비를 많이도 기다렸다. 단비였다. 빗방울이 길바닥에 압정 튀듯 또르르 경쾌하게 나뒹굴었다. 숱한 나팔꽃이 피었다 졌다 하는 모습이었다.

마침 비가 내린 날은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였다. 처서에 오는 비는 예로부터 '처서비'라고 하여 농사를 망친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이번 비에 들녘의 농부들은 가뭄이 해갈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타들어가던 산천도 푸르게 웃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모기 입이 비틀어져도 기다리던 비가 왔고, 더할 나위 없는 단비였다. 궂다는 처서비가 필요한 약 같은 '약(藥)비'였다.

비가 온 뒤 날씨가 싹 바뀌었다. 아침저녁은 한꺼번에 가을로 질주하고 있다. 밤과 새벽의 대지에 귀뚜라미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라는 릴케의 '가을날'을 남김 없이 읊조리고 있다.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는 '자연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처서가 지나면 옷과 책을 음지에 말리는 음건(陰乾)과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쇄)를 한다고 했다. 더위에 지쳐 축 늘어진 마음을 꺼내 거풍(擧風)할 때가 됐다. 때가 이르렀다. 최학림 논설위원 theos@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