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방독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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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계 기린아 '곡사 형제'가 그린 '한국 사회 점묘화'

방독피. 두엔터테인먼트 제공

불길하다. 혼란스럽다. 난해하다. 과격하다. 보고 나면 수없이 스쳐 지나갈 상념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일지언정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김곡·김선 감독(일명 곡사 형제)의 '방독피'는 급작스럽게 퍼지는 독가스처럼 미처 방독면을 쓰지 못한 관객들을 습격한다.

대개의 영화들이 내러티브라는 반듯한 레일 위에 차곡차곡 정리된 이야기들을 쌓아 올리는 것에 반해 '방독피'는 해체 이전의 불온한 감정 덩어리를 통째로 관객의 가슴팍 한가운데 내리꽂는다. 나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것처럼 어지럽고 무질서한 상태의 진득한 덩어리.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아름답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한국. 방독면을 쓴 연쇄살인범이 활개치고 다니는 도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와 비틀린 광기 속에서 태연히 살아간다. 악의와 독기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 연쇄살인범을 잡으려는 주차요원, 연쇄살인범에게 죽고 싶은 늑대소녀, 연쇄살인범에게 복수하고 싶은 미군병사, 연쇄살인범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서울시장 후보의 이야기가 한데 뒤엉킨다. 4편의 옴니버스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전혀 별개의 생물처럼 각자 이야기를 풀어 놓다가 어느 순간 한 올에서 풀어헤쳐진 실타래처럼 서로를 잡아끌기 시작하는데, 다소 극단적이고 과장된 사연들은 어느새 한국 사회를 치밀하게 묘사한 거대한 점묘화로 이어진다.

부조리 고발… 불온한 정서 난무
어렵고 불쾌해도 아름다운 영화

독립영화계의 기린아로 자리매김해 온 곡사 형제의 영화는 불편함 가운데 눈 돌릴 수 없는 진실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는 4인의 캐릭터 각자의 사연을 나열, 조합하는 멀티 플롯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4명의 이야기조차 거대한 밑그림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방독피'는 인물들의 사연 그 자체보다는 불안과 강박이라는 감정을 직접 표출하는 일종의 추상화에 가까운 영화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살해 장면은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 영화 전반 유령처럼 불안감을 퍼트린다. 이후 등장하는 네 명의 캐릭터는 사건에 반응하는 우리 사회의 병적 증상이랄 수 있다. 그들은 각자의 상징과 우화를 통해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모순을 고발하고, 분노를 터트린다.

전반적으로 환상을 자아내는 음산한 분위기 하에서 극단적인 표현들이 난무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론 매우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인다. 영화보다 잔인한 현실 앞에 영화의 환상성은 외려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힘이자 의미다.

다소 접근하기 두렵고 어렵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끝에 자리한 울림은 근래 쉽게 접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최근 관객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영화들로 난무하는 한국영화판에서 그 들끓는 에너지와 불온한 정서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강단이 느껴진다.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대로, 불쾌하면 불쾌한대로 의미 있는 쓴맛을 지닌 영화다. 우리는 이런 쓴맛에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22일 개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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