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이고르와 학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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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성장담 특별한 연출

이고르와 학의 여행. 백두대간 제공

우리는 갖가지 비유 속에 둘러싸여 산다. 비유란 일종의 짧은 이야기다. 말로 다 담아내지 못할 경험을 전하기 위해 빌려 오는 당신의 이야기. 교과서에서 '내 마음은 호수'란 비유를 접할 때 우리는 호수에 가 본 사람, 책이나 영상을 통한 간접체험만 해 본 사람 등 '호수'에 관한 수많은 체험 속에 잠긴다. 사람들은 이 절대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체험 위에 대상을 투영함으로써 모호한 것을 이해한다.

예프게니 루만 감독 역시 소년의 모호한 심리를 영화라는 보편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에 비유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고르와 학의 여행'의 큰 뼈대는 수많은 영화에서 되풀이되었던 성장담과 별 다를 것 없다. 제목은 '이고르와 학의 여행'이지만 실상 '학의 여행을 관찰하고 상상하는 이고르'라고 해야 마땅하다.

흩어진 가족 아파하는 소년
철새 관찰하며 마음의 위안
담백한 영상미 공감 이끌어


이고르(이타이 슈체르베크)는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평범한 소년이다. 조류학자인 아빠는 엄마와 이혼한 후 새 연구에 빠져 사느라 자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고르는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어느 날 이스라엘에 일자리를 얻은 엄마를 따라 이사한 이고르는 말도 잘 안 통하는 그곳에서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그런 이고르를 위로해 주는 것은 예전에 아빠와 함께 러시아의 습지에서 발견하여 이름 붙인 새끼 학 '칼'의 여행이다. 아빠는 이스라엘을 경유해 아프리카로 향하는 철새들의 이동을 관찰해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리고 이고르는 간간이 그 소식을 접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루만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이고르와 학의 여행'은 보편적인 성장의 드라마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인 체험이 녹아들어 간 영화다. 어린 시절 이고르처럼 이스라엘에서 학을 관찰하며 성장한 감독은 마치 자신의 체험을 일기에 옮겨 쓴 것 마냥 세세하게 소년의 불안하고 외로운 심리를 짚어 낸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매우 상식적이고 쉽다.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소년은 평생 가족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학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소년의 일상은 철새의 여행과 대구를 이룬다. 학의 여행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과정에서 소년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영화 전반이 듬성듬성 비어 있다는 데 있다. 영화는 도식적인 비유를 위해 드라마를 꽉 짜 넣는 대신 철새도래지와 같은 자연풍광을 펼쳐 놓거나 손 그림의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이고르의 상상을 불쑥 들이민다. 건성으로 관찰하는 것 같은 이 느슨한 카메라야말로 식상한 드라마를 특별한 체험으로 변모시키는 힘이다. 소년과 학을 이어 주는 지점을 빤한 이야기로 채워 넣지 않고 다양한 심상을 떠올릴 수 있는 풍경으로 대신함으로써 여행과 성장에 대한 공감 가는 비유가 완성되는 것이다. 철새 도래지의 탁 트인 풍광처럼 시리고 단조로워 더 담백한 '당신'의 영화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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