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54. 퍼시픽림 OST
마니아의, 마니아에 의한, 마니아를 위한 영화
'이 영화를 레이 해리하우젠과 혼다 이시로에게 헌정한다'. 이 문구는 길예므로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퍼시픽림'의 마지막 크레딧 문구입니다. 이 문구가 지나가고 영화관의 불이 켜졌는데도 전 한참 동안 먹먹한 마음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한여름철 그 흔한 할리우드 로봇 블록버스터 한 편에 왜 이리도 청승이냐고요?
우선 레이 해리하우젠은 할리우드 특수효과의 거장입니다. 1977년 발표된 신밧드의 모험을 비롯해 할리우드 공룡 괴수물을 디자인하고 만들었던 크리에이터이자 미술가였습니다. 컴퓨터 그래픽 이전의 스톱모션 기술을 이용해 만들었던 그의 작품들은 이후 괴수 로봇 및 공상과학물의 근본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올해 그가 세상을 떠나고 많은 스타 감독들이 그를 추모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혼다 이시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등과도 작업을 같이했던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유명한 전설의 괴수 고질라 시리즈를 탄생시킨 주인공이죠. 퍼시픽림처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물이 마지막 크레딧에 누군가에게 영화를 헌정한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데요.
"할리우드 로봇 블록버스터
영화만큼 강렬한 영화음악"
이 영화는 이처럼 로봇 블록버스터의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중심 초점은 기존의 블록버스터와는 상당히 다른 곳을 향해 있습니다. 바로 마니아의, 마니아에 의한, 마니아를 위한 영화라는 것입니다. 하위문화로 일컬어졌던 오타쿠 문화의 로망이 현대 테크놀로지를 통해 드디어 눈앞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판타지의 결말이자 꿈의 충족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인 것이죠. 이 영화의 비쥬얼과 미술은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아바타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중 단연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랍습니다. 이 영화가 아키라나 공각기동대를 비롯한 에반게리온 등 일본 괴수영화에 대한 집착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문제는 소수의 취향과 마니아적인 감성들이 이렇게 미래의 어느 날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휼륭한 테크닉과 소통의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로망을 실현한 마니아의 훌륭한 작품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저 역시 이토록 이 영화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보니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맴도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앨범 수록곡을 들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