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다-대안적 삶을 꿈꾸다] 16. 옥상텃밭을 가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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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고추·오이… "삭막한 콘크리트 도시에 눈부신 초록의 향연"

한충원·염말례 씨 부부가 연제구 거제1동 다세대주택 원룸 옥상에 설치한 텃밭에서 갓 수확한 오이와 상추, 고추 등을 자랑하고 있다. 강원태 기자

처음엔,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싶었단다. 버려지다시피한, 쓸모없는 옥상에서 농작물을 키운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일단 도전한 게 아주 잘한 결정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들고 '옥상텃밭'의 재미를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다고도 했다. 2013년 부산시 도시옥상농원 조성 사업을 통해 개인주택 옥상에, 다세대주택 원룸 옥상에, 복지관 건물 옥상에 '텃밭'을 들인 사람들, 그들은 왜, 도심 옥상에서 농작물을 키우기로 한 것일까? 그들을 직접 만나 보았다.

돌보고 기다리고 배려하는 마음 커져

연제구 다세대주택 옥상


지난 26일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간 곳은 부산 연제구 거제1동 다세대주택 '샘터 원룸'. 옥상으로 올라가기 전, 집주인 한충원(63) 씨가 기자를 안내한 곳은 뜻밖에도 샘터 원룸 1층의 '황새 알 우물터'였다. 주택가에 100년 넘은 우물이 남아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아직도 샘이 솟아 동네 어르신들이 허드레 빨랫감을 가지고 나와 가끔씩 이용한다고도 했다.

한 씨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지문인식 자동문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원룸 시설을 통과한 뒤 맞닥뜨린 서른 평 정도 되는 옥상텃밭은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했다.

옥상에선 한 씨의 아내 염말례(59) 씨가 이미 상추, 고추, 오이 등을 한 소쿠리째 따고 있었다. 나무덱 5개, 고무상자 25개가 즐비한 옥상텃밭에선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호박, 돌미나리, 더덕, 취나물, 쑥갓, 부추, 파프리카, 머위, 방아, 파, 땅콩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원룸 주변을 둘러싼 고층 빌딩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초록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것 한 번 보실래요? 올봄 묘목으로 심은 블루베리도 얼마나 잘 익었다고요!"

대형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블루베리 한 그루만 봐도 이 부부가 텃밭 가꾸기에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린아이 팔뚝보다도 더 크게 자란 오이, 몇 번이고 따 먹어서 이젠 제법 꽃대가 올라온 상추까지 보는 사람 마음이 더 푸근해졌다.

-두 분, 농사 경험이 있으셨나봐요.

"농사라뇨, 남편은 서울 출신, 저는 부산 토박이여서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그래서 이렇게 흉내라도 내면서 살 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죠?

"막연하게 텃밭을 하면 유기농 먹을거리는 해결되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옥상농원 조성 사업' 현수막을 보고 연제구청(경제진흥과)에 신청을 한 거죠. 처음엔 남편이 얼마나 반대했다고요."

-왜, 반대를 하신 겁니까?

"새 원룸인데 옥상이 지저분해진다는 거예요. 게다가 농작물 재배를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래도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어려움도 많으셨겠어요.

"처음 구청에서 준 상추 고추 모종은 파종 시기가 너무 빨라서 죽었어요. 지금 자라고 있는 것들은 새로 파종한 것들이에요."

-두 분이 먹기엔 많지 않나요?

"물론이죠. 우리 집은 24가구가 살고 있는 다세대 원룸이잖아요. 대부분이 학생이거든요.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 써 붙였어요.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니 옥상에 올라가서 구경하시고 따서 드세요.' 필요할 때마다 따 먹으니 학생들도 좋아하고 부모님들도 얼마나 좋아하신다고요."

-텃밭이 두 분 삶에 어떤 변화를 주던가요?

"일단 작물을 키워 보니까 돌보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 같아요. 처음에 반대하던 남편도 지금은 작물이 기다려진다고 하고, 학생들이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니까 기분 좋고요, 그리고 그렇게 말이 없던 남편이 만나는 지인마다 작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걸 보면 신기해요. 푸른 부산, 아름다운 부산이 별건가요? 이렇게 일조하는 거죠."

-이젠 어느 정도 자신감도 붙으신 것 같습니다.

"5년 전 퇴직할 때도 시골살이 계획은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자연을 가까이 하니까 참 좋네요."

샘터 원룸을 떠나는 기자를 갑자기 염말례 씨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아침에 딴 큼지막한 오이를 양 손에 쥐어준다. 이런 게 다 정이라면서. 

지게골복지관 사회복지사들이 우암2동 마을 주민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복지관 옥상텃밭에서 수확한 방울토마토와 상추, 고추, 호박, 오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강원태 기자

적은 양이라도 함께 나누니 기쁨 '배'

남구 지게골복지관 옥상


부산 남구 문현4동 지게골복지관을 찾아가면서 생각했다. 사회복지사 일만으로도 벅찰 텐데 어떻게 텃밭까지 꾸릴 생각을 했을까. 

"처음엔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복지관 직원뿐 아니라 노인일자리 어르신, 복지관을 이용하는 분들이 쉴 만한 공간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햇볕 잘 드는 옥상에 텃밭도 하고, 쉴 수 있는 파라솔도 설치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까진 나왔는데 비용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죠."

선지연(30) 팀장의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게골복지관은 도로가에서 얼마 들어오지 않은 골목에 위치한 데다 건물 한 동만 우뚝 서 있는 형국이어서 여유 공간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어느 날 김연화(28) 사회복지사가 말했다. "팀장님, 남구청 홈페이지에 옥상텃밭을 지원해 준다는 공지가 떴어요!"

하지만 게시문에는 옥상농원 지원 사업 대상 범위가 주택,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으로 나와 있었고, 복지관 포함 여부는 불분명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하는 과정을 거쳐 선정까지 되었다. 이후 4월 들어 복지관 옥상에 나무덱 텃밭과 파라솔이 설치되고, 복지관 직원들과 이용자들이 함께 상추, 치커리, 고추, 오이, 호박, 딸기, 가지, 파, 방울토마토를 정성스레 심었다. 작물이 자라나면서 지게골에선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텃밭이 생기고 난 후 직원들의 생활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요. 출근만 하면 텃밭에 가서 농작물이 간밤에 잘 자랐는지 확인하고, 점심시간에도 텃밭을 보면서 커피 한 잔을 하고,집에 가기 전엔 꼭 물을 주면서 옥상에 올라가는 횟수가 늘어났어요.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직원들끼리도 얘깃거리가 더 생겨났어요. 내친 김에 파라솔도 한 대 더 늘렸고요."

-수확한 농작물은 어떻게 하나요?

"지난달 맨처음 수확한 건, 지역 어르신들께 드렸어요. 또 경로당과 경로식당에도 나누고 있어요. 매주 수요일 우암2동 지역을 다니면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해결방안을 찾는 사례관리팀 활동이 있는데 첫 수확한 상추와 치커리를 들고 나가서 주민들께 전달했어요. 그때 어르신들이 그러더군요. '아이고~ 처녀총각들이 희한한 재주가 있네. 여름에 햇감자 날 때 오이라'…. 어쩌면 우리가 나눈 건 단순한 상추, 치커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라진 줄만 알았던 이웃간의 정, 같이 먹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정신 건강에 확실히 좋겠네요!

"그럼요. 삭막한 콘크리트 도시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축복이죠.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옥상텃밭이 사회복지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발견이었고요. 우암동 텃밭 이야기를 홈페이지나 소식지에서도 다룬 것도 그 맥락이었고요.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어요,"

그래서일까, 지게골 식구들은 지금도 말한다. 우리 손으로만 키우고, 우리만 먹지 않겠다고. 그래서 복지관 옥상텃밭은 가족상담센터 이용자와 지역주민들에게 재분양도 하고 있다. 7세 민제네 가정이 방울토마토 5그루를 분양했고, 이후로도 몇 가정이 추가됐다. 오늘도 서승희(29) 사회복지사는 옥상텃밭 분양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청일점' 주용현(26) 사회복지사는 이날도 우암2동을 주민들을 만나서 전해줄 상추와 고추, 방울토마토를 열심히 수확했다.

때마침 옥상텃밭에 올라왔던 경로식당 정윤아 주방장이 한마디 툭 던졌다.

"우리 텃밭 방울토마토 진짜 맛있는데, 드셔 보셨어요? 직접 먹어봐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세 딴 방울토마토 몇 개를 씻어서 입에 넣어주는데 꿀맛이었다. 
신영호·하선애 씨 부부가 해운대구 우동 자택 옥상텃밭에서 딴 고추를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그 좋은 걸 혼자만 하냐" 이웃들 원망

해운대구 단독주택 옥상


이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신영호(65) 씨 단독주택 옥상텃밭. 내비게이션에 지번까지 넣어서 찾아갔건만 목적지를 찾지 못해 근처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신 씨가 골목 바깥까지 마중을 나와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게 아닌가.

"텃밭도 텃밭이지만 일단 커피 한 잔부터 하고 옥상에 올라갑시다. 날도 더운데 뭐 하러 여기까지 오고 그럽니까!"

2001년 모 시중은행 지점장으로 명퇴한 신 씨는 텃밭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올해 해운대구청 지원을 받아 옥상텃밭을 하기 전까지 기장 철마의 친구 농지에서 몇 고랑을 얻어서 2년간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그 농지를 정리해야 할 상황이 생겼고, 갑자기 텃밭이 없어지자 신 씨 부부는 이젠 포기해야 하나 싶어 참으로 심란했었단다. 물론 그 전엔 농사라곤 일절 지어본 적이 없었지만 직접 텃밭을 하면서 소소한 재미를 한껏 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중단됐으니 말이다.

"1주일에 한두 번씩 기장 텃밭 가는 게 우리 노부부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왔다갔다 하는 게 간단하진 않았어요. 게다가 차를 몰고 가면 기름값 써야죠, 가면 또 밥 사먹고, 목욕하고… . 비용도 만만찮았죠. 그래도 좋으니까 계속 다녔는데 못 하게 되니까 안타까웠죠. 그러던 중 해운대구청의 도시옥상 조성 사업 이야기를 듣고 신청한 것이지요."

-옥상텃밭만의 좋은 점이 있나요?

"제일 좋은 점은요, 우리 2층에 전세 사는 분이 시원하다고 해요. 옥상텃밭을 설치하고 나니까 정말 시원해졌어요. 전세 사는 분이 맨날 덥다고 해서 정말 미안했는데…. 그리고 멀리까지 안 가도 되니 돈도 절약되죠. 모르긴 해도 한 달에 10만 원 정도는 줄어들지 않을까요."

옆에 있던 신 씨의 부인 하선애(58) 씨도 거들었다.

"가까이 있으니까 정말 좋아요. 돈으로 따지면 별것 아니지만 아침저녁으로 매일 들여다보는 게 즐거움이죠. 은행 직원 성질 알지예. 정말 꼼꼼한 것. 우리 아저씨는 아침에 눈 뜨면 옥상부터 올라가요. 오늘도 아침에 올라가서 계란껍질로 만든 칼슘제 주고 왔다니까요."

-칼슘액비를 직접 만들었다고요? 어디서 배운 적이 있습니까?

"인터넷에서 찾아서 배웠지요. 우리는 쌀뜨물액비도 만들어주고 있어요. 사실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런 것도 필요하고, 저런 것도 필요하고, 모르는 것 있으면 자주 가는 종묘상에 가서 직접 묻기도 해요. 그 정성이 정말 대단해요."

25평 정도 되는 신 씨의 3층 옥상텃밭에 올라가자 가지, 고추, 상추, 케일, 정경채 등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고추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빨갛게 익을 때까지 놔뒀다가 올가을 김장할 때 고춧가루로 빻아서 우리도 먹고, 아들 딸네도 주려고요."

-이 사업, 내년에도 신청하실 겁니까?

"아, 그 말씀 안 드렸구나. 제가 이번에 이것 신청하고 우리 계원들이랑 친구들, 이웃 사람들한테 얼마나 원망을 들었다고요. 왜, 그 좋은 걸 안 알려주고 혼자서만 하냐고요. 처음엔 우리도 이럴 줄 몰랐죠.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도 말을 안 한 거고요. 개인주택은 3구좌까지 신청 가능한데 오죽하면 우리도 2구좌만 했을라고요. 그나저나 내년엔 신청자가 많아서 어찌할라나 모르겠네요. 요즘 우리집은 이 동네 명소예요. 그리고 텃밭 하러 멀리까지 갈 것도 없어요. 옥상에 밭 만들면 훨씬 싸게 먹힌다니까요! 우리 같은 노부부에게 딱이에요, 딱!"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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