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르포] 원전 인근 주민 격앙된 목소리
"청와대 옆에 원전을, 고리 옆에 원안위를"
끊이지 않는 원전 비리와 관련해 고리 원전 인근 주민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원전안전위원회 이은철 위원장은 답답한 듯 "그럼 원전을 지금 바로 꺼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60여 명의 주민은 일제히 "네"라고 대답했다.
이 위원장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력수급 문제 등을 고려하면 원전을 끈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는 주민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양측의 인식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원전 지금 꺼야 합니까"
이은철 원안위원장 질문에
주민들 일제히 "네" 대답
뜨거운 간담회 주민 성토 빗발
"수도권 혜택, 우린 스트레스"
4일 낮 12시 30분께 부산 기장군 장안읍사무소 강당에서 이은철 위원장 등 원안위 관계자와 주민들의 간담회가 열렸다. ▶관련기사 6면
이 위원장이 취임 뒤 한 달 반 만에 주민과 간담회를 마련했지만, 곧 생각보다 깊은 인식 차이가 드러났고 이 자리는 정부 성토장으로 변했다.
이 위원장은 "상당히 놀랐으리라 생각한다. 죄송하기 짝이 없고 낯을 들 수 없다"며 고개를 숙이며 간담회를 시작했다.
곧이어 강당 스크린에 문제가 된 원전 제어케이블의 시험성적서의 원본과 위조된 그래프가 뜨고, 원안위 측 인사가 올라와 그간의 경과와 문제점을 설명했다.
주민들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주민들이 듣고 싶은 말은 개별 비리 사안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는 명료한 대답이었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자 간담회가 뜨거워졌다.
"한수원을 믿을 수 없다. 원안위도 못 믿겠다", "일을 잘해야 믿을 것 아니냐", "책임지고 위원장이 사퇴해라" 등 감정적이지만 솔직한 주민들의 발언이 쏟아졌다.
이 위원장은 "현실적으로 납품 비리를 완전히 적발하기가 힘들다. 90명 원안위 인력 중 절반이 행정직이다. 인원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원전 관리 구조에 따른 나름 솔직한 고민이었겠지만, 생존이 걸린 주민에겐 '변명'으로 들렸다.
박갑용 장안읍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신고리 1·2호기까지 이러니 원전 관계자 전체를 못 믿겠다. '원전 마피아'라는 말도 있다"고 하자, 이 위원장은 "마피아라는 말은 거북하다. 원전 분야에는 시공, 자재납품, 건설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답했다.
이어서 한 여성 주민이 마이크를 들었다. "수도권은 발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고, 스트레스는 우리가 떠안고 있다"며 "청와대 옆에 원전을 짓고, 원안위 사무실을 고리 원전 옆으로 옮겨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옳소"라는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원전 문제의 한 축이 지역 차별성이라는 것도 주민 모두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루하게 시작된 간담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워져 2시 가까이 되어서야, 이 위원장의 "만족스럽게 답변 못해 죄송하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강당을 나서는 주민들 사이에선 아직도 못한 말이 남았는지 "너무 가려가며 말한 거 아니야"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 위원장과 원안위 관계자들은 이날 오후 7시께 해운대 센텀시티 한 식당에서 반핵단체를 포함한 시민단체 대표와 관련 학과 교수 등 10여 명과 함께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이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원전 비리 유인책으로 포상금제 도입을 검토 중이며, 부산 지역 시민단체나 지역대표들의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는 '핫라인' 구성 등을 약속했다.
이은철 위원장은 미팅 자리에서 "솔직히 오늘 들은 말보다 더한 말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한다"며 "지역 내 시민단체 등이 현안을 두고 토론회를 열면 언제든지 원안위가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미팅에 참석한 반핵시민대책위 최수영 공동위원장은 "시민단체들과 직접 대화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진일보한 것이지만, 폐쇄성 극복을 위해선 말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김백상 기자 k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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