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규 칼럼] '익숙한 것과의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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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어느 날 아버지는 어린 딸을 데리고 계곡에 걸려 있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얘야, 여기서부터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라." 그러자 딸은 이렇게 말했다."안돼요, 아빠. 아빠가 내 손을 잡아 주세요." "그래? 그렇지만 내가 네 손을 잡는 것과 네가 내 손을 잡는 것이 뭐가 다르니?" 의아해하는 아버지에게 딸이 대답했다. "그건, 아주 달라요. 내가 아빠 손을 잡으면, 미끄러져 잘못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아빠 손을 놓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아빠가 내 손을 잡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빠는 내 손을 놓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부음 기사를 보고 고인이 보냈던 많은 메일 중 하나를 다시 읽었다. 세상사에 무한 신뢰가 있겠냐마는 신뢰의 참뜻을 명쾌하게 표현한 글이라 지우지 않고 보관해 왔다. '직장인의 멘토'이자 '친구'인 구본형(59) 변화경영연구소 대표. 자기계발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가 며칠 전 많은 독자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3년 전 본보에 '부일시론'을 쓴 인연으로 이후 그와 메일을 주고받았던 터라 '낯선 사람의 부고'는 아니었다. 소식을 접한 직장인들은 SNS를 통해 "우리를 친구로 대해 준 유일한 스승으로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며 슬퍼했다.

결별해야 할 재벌그룹의 관행적 일감몰아주기
대통령에게 익숙했던 '수첩', 이젠 용도폐기해야

지난 1998년 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과 함께 우리 사회가 실업, 실직의 고통에 시달리던 시절, 그가 쓴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직장인에게 처음으로 건네진 위로며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책에서 그는 정말 소중한 것들이 아니라면 익숙한 관행과 습관들에 대해서 결별할 것을 강요하기까지 했고, 수많은 직장인과 기업인들이 이에 공감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며, 미래는 이미 아주 다른 얼굴로 벌써 다가와 있다. 어제와 현재의 연장으로 미래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책 속의 한 구절이다. 최근 경제민주화 논란을 보며 15년 전의 그 메시지는 아직 유효함을 체감한다.

등기이사의 연봉 공개를 반대하는 재계의 움직임에서 다시 한 번 '울타리' 속에 안주하면서 낯선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엿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연봉 공개가 임직원 간 위화감을 키우고 노사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 그러나 연봉 공개는 책임경영과 투명성을 높이자는 게 기본 취지다. 경영성과가 나쁘면 당연히 경영진의 연봉도 깎여야 한다. 일본은 연봉 1억 엔 이상을 받는 등기이사의 보수금액과 세부내용을 공개한다. 미국도 연봉을 많이 받는 상위 5명이나 10명에 대한 보수 규모를 공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스위스는 지난달 국민투표를 통해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기업 경영진의 보수를 주주가 결정하도록 규제하는 내용이 골자인 주민 발의안을 67.9%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 규제안에 붙은 이름이 '살진 고양이(fat cat)법'이다. 일주일 전 스위스 프라이빗뱅크에선 주주들이 최고 경영진에 대한 보수 안건을 부결시켰다. '살진 고양이법'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주목할 정도로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연봉법'은 약과다.

공정한 경쟁기회를 빼앗는 일감 몰아주기도 마찬가지다. 모든 내부거래가 '나쁜 거래'가 아니겠지만 보안이나 영업비밀 등 내부거래가 불가피한 분야를 제외하더라도 관행적으로 보편화되어 온 게 사실이다. 재계도 이제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과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순기능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돈 벌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준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소홀히 하면서 일류 기업이 되기는 어렵다. "중소 납품업체가 수익을 내는 것을 대기업이 제발 배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느 하청업체 대표의 하소연은 왜 나왔겠는가.

박근혜정부의 내각 구성이 출범 52일 만에 마침내 완료됐다. 과거 정부에 비해 유달리 무거운 발걸음이다. 어쩌면 박 대통령 본인이 애당초 구상했던 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답답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정부의 인사 실패사례를 숱하게 봤음에도 같은 문제로 또다시 홍역을 치른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인상은 부정적인 것이 더 많아졌다. 대통령이 중요가치로 여기던 원칙과 신뢰도 퇴색됐다. 이제 자신이 눈여겨봐 둔 사람을 일방적으로 낙점하는 하향식 '수첩 인사'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익숙한 '수첩'과 결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고 구본형 대표가 '익숙한…'에 이어 펴낸 책이 '낯선 곳에서의 아침'이다. 박 대통령도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고 '낯선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k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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