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봄날, 남명 조식의 흔적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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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지난주 학과에서 매학기 추진하는 역사문화 현장답사를 다녀왔다. 장소는 함양, 산청, 진주, 통영, 거제 등 경상남도 일대. 고운 자태를 서서히 드리우는 벚꽃과 개나리는 남녘에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답사 지역 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곳은 지리산에 자리를 잡은 남명 조식의 유적지인 산천재와 덕천서원, 세심정이었다.

'경(敬)'으로 수양, '의(義)'로써 시대비판 실천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 조식(1501~1572)은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 받은 후에 올린 사직 상소문에서 당시의 위기 상황을 날선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권력자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사(孤嗣)로 표현한 부분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에 파생되는 외척정치의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군주 앞에서도 조식은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조식의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로 남명을 처벌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조식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남명을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정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재야 선비의 발언을 존중한 것은 오늘날에도 주목할 만하다.

조식은 학문에 있어서 무엇보다 수양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는 사상의 핵심이었다. 조식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하였다. 경의 상징으로는 성성자(惺惺子:항상 깨어 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를 새긴 경의검을 찼다. 방울과 칼을 찬 학자. 유학자로는 언뜻 떠올리기 힘든 캐릭터이지만, 조식은 이러한 모습을 실천해 나갔다. 조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과감한 상소문을 올렸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들에게는 강경한 대왜관(對倭觀)을 심어 주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그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자리 잡은 곳 현재의 산청군 덕산에서는 조식의 기개와 정신이 서린 역사의 현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후학들을 양성하고 지리산의 웅혼한 기상을 닮고자 했던 곳이다. 조식은 생전에 10여 차례 지리산을 유람했고, "청컨대 무거운 종을 보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지리산과 꼭 닮아서,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네"라는 시와, 1558년의 지리산 기행문인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지리산을 경외한 그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산천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툇마루 윗벽에 그려진 벽화이다. 농부가 소를 모는 그림인데,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은자(隱者) 소부와 허유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소부와 허유는 요 임금이 천하를 맡기고자 했지만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허유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며 귀를 씻었고, 허유가 영천에서 귀를 씻고 있는 것을 본 소부는 소에게도 그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며 돌아갔다고 한다. 처사의 삶을 지향한 조식의 모습과도 매우 닮아 있다.

조식의 기개와 정신 서린 산천재와 세심정

조식은 묘소도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산천재 맞은편에 잡아두었다. 높지는 않지만 이곳에 오면 천왕봉이 바라보이고, 덕천강과 덕산 마을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현재 남아 있는 조식의 묘비 군데군데에는 한국전쟁 때 입은 총상의 흔적들이 선명하여, 씁쓸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덕천강변에 자리를 잡은 세심정은 조식이 후진을 교육하는 틈틈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세심정 옆에는 조식이 남긴 시 중에 '욕천(浴川)'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온몸에 찌든 사십 년의 찌꺼기를, 천 섬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없애리라. 그래도 흙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라는 이 시에는 시대의 모순에 맞서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선비 조식의 칼 찬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덕천서원은 스승이 사망한 후 5년이 지난 1576년(선조 9)에 후학들이 스승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기축옥사로 희생을 당한 조식의 애제자 최영경도 스승과 함께 배향되었다. 남북 간의 긴장 관계가 계속되어서인지 조식과 같이 문무를 겸비한 학자가 더욱 그리워지는 시점이다. 산천재와 세심정, 덕천서원 등 조식의 유적지들을 찾아보면서, 선비의 기상과 선비정신을 음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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