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부산 등대] 13. 신당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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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는 늘 봐도, 더 가까이 가지 못하니…

신당등대가 서 있는 신당항에는 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었다. 신당이 있었단 건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할 배가 많았단 뜻. 조선시대 수군통제영이 수영에 있었으니 한때 범선으로 북적였을 테다. 귀하게 모시고, 감싸고 보듬어야 할 포구다. 홍등 녹등이 마주 보는 신당등대도 그걸 아는지 오가는 배를, 조류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만 같다. 사진=박정화 사진가

등대를 보고 있으면
불 들어오는 것과
불 들어오지 않는 것
세상은 이 둘임을 알겠다
사랑도 그렇지 않겠나 싶다
불 들어오는 사랑과
불 들어오지 않는 사랑
불 하나가 들어오면
불 하나가 들어오지 않는
광안대교 바로 아래
신당등대 등대를
보고 있으면
비로소 알겠다
불 들어오는 것과
불 들어오지 않는 것
이 둘이 다르지 않고 같음을
들어올 때도 간절하게 들어오고
들어오지 않을 때도
간절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 동길산 시 '신당등대'


마주 보는 등대는 속이 타겠다. 보기는 늘 봐도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니.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늘 봐도 다가가지 못하는 그 속은 오죽 탈까. 마주 보는 등대라도 동시에 반짝이는 등대는 좀 낫겠다. 타는 속을 한날한시 주고받으니.

마주 보면서도 따로따로 반짝이는 등대는 속이 더 타겠다.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속 타는데 주고받는 마음마저 매번 어긋나니. 하나가 마음을 열면 다른 하나는 닫고 하나가 마음을 닫으면 다른 하나는 여는 두 등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이 시커멓게 탔겠다.

행복은 뭘까. 행복이 뭔지 가끔 생각한다. 생각은 하는데 잘 모르겠다. 높은 데서 바라보면 수평선이 높아지고 낮은 데서 바라보면 낮아지듯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행복은 달라지지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어디에서 봐도 그 수평선이 그 수평선이란 걸. 다르지 않고 같다는 걸.

이런 생각도 든다. 속이 탈수록 시커멓게 탈수록 행복한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을 먹으면 쉽사리 얻는 행복도 행복이지만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얻지 못하는 행복이 더 큰 행복이 아닐까 하는. 그 대표적인 게 이루지 못한 사랑.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더욱 그렇다. 속은 시커멓게 탔지만 흑단처럼 나전칠기처럼 윤이 나던 청춘의 맨 앞장.

신당등대는 수영강 길목 등대다.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맨 앞장 등대다. 홍등과 녹등이 6초에 한 번 깜박이며 마주 본다. 홍등이 마음을 열면 녹등이 닫고 홍등이 마음을 닫으면 녹등이 여는 등대라서 속은 탈 대로 타 버린 등대다. 저러다 제 열기에 북받쳐 스스로 분신이나 하지 않을까, 이십사 시간 등대를 주시하는 강은 여차하면 강물을 끼얹을 기세다.

신당등대가 있는 곳은 민락교 입구 포구. 푸르지오 아파트 맞은편이고 광안대교 바로 아래다. 해도엔 여기가 신당항이라고 나와 있다. 포구 모서리 파출소 간판도 부산해경 신당파출소다. 신당이라. 감이 얼른 잡히지 않는다. 성큼성큼 파출소에 들어가서는 당직자에게 다짜고짜 물어본다. 왜 신당이냐고.

"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어서 신당이라네요." 당직자는 이종화 경사. 제주해경에 근무하다 여기 온 지 한 달밖에 안 돼 잘 모르겠다며 어촌계장에게 전화로 알아봐 준다. 매립되기 전 신당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단다. 부산 포구 열이면 열이 지명을 딴 이름이기에 지역 색깔이 도드라진 신당항은 귀한 이름이다. 귀하게 모셔야 할 포구다.

해도엔 신당항이지만 도로표지판 표기는 우동항이다. 어촌계 이름도 우동어촌계다. 여기가 행정지명으로 해운대구 우동인 까닭이다. 우동은 왜 우동일까. 해운대구엔 중동이 있고 중동 양옆이 좌동이고 우동이다. 좌우의 기준점이 있을 터. 장산이 기준점이다. 장산에서 봐 왼편에 있으면 좌동이고 가운데는 중동, 오른편이 우동이다. 오른 우, 왼 좌를 쓰다가 언제부턴가 사람 인 변을 붙여 도울 우, 도울 좌를 쓴다. 해운대구청 있는 곳이 중동이고 신시가지가 좌동이다. 우동은 수영강 방향이다.

신당항은 보기완 딴판이다. 민락교를 지나면서 보면 그저 그런 포구지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보기보단 규모가 있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조선소가 있는 포구고 출장소이긴 하지만 해양파출소가 있는 포구다. 무엇보다 신당이 있었던 포구다. 신당이 있었단 것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해야 하는 배가 많았단 반증이고 그것은 곧 이곳을 드나드는 배가 많았단 반증이다.

신당항은 분명 호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낙동강 하구 하단포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바다와 강이 만나는 수영강 하구 신당포구도 범선으로 북적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수군통제영은 요즘 말로 하면 해군작전사령부. 조선 시대 경상도 수군통제영이 통영과 수영 두 군데만 있었던 걸 감안하면 수영 신당포구는 이제라도 우러러봐야 할 포구다. 감싸고 보듬어야 할 포구다.

등대도 아는 눈치다. 등대가 의탁한 곳이 지금은 갓끈 떨어져 그저 그런 신세지만 한때는 문전성시 대갓집이었단 걸.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 했던가, 비록 입성은 허술해도 어딘지 모르게 부티가 나고 귀티가 나는 포구라서 등대도 언행을 삼간다. 입이 무겁고 동작이 무겁다. 포구로 들어오는 조류도 분위기에 눌려 조심스럽다. 그게 바닷물이든 강물이든 포구의 눈치를 살피며 들어오고 등대의 눈치를 살피며 들어온다.

그게 바닷물이든 강물이든 등대는 개의치 않는다. 출신을 따지고 성분을 따지는 건 세속의 일. 신당등대는 신을 모시던 곳에 있는 등대라서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등대가 뿜어내는 기운은 정갈해서 신이 계시다는 하늘로 솟구친다. 신당등대에선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솟구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철제 계단을 딛고 등대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 신들린 듯 계단을 딛고 올라가 철문을 열면 신과 동격인 태양이 발산하는 열을 받아들이는 배터리가 신주처럼 모셔져 있다.

철문을 닫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등명기. 외부로 드러난 등명기는 길쭉하달지 뾰족하달지 생겨 먹은 게 꼭 펜촉이다. 캄캄한 밤하늘을 습자지 삼아 녹색 홍색 펜글씨를 쓰는 등대가 신당등대다. 광안대교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이 쓰는 글씨가 난필이라면 신등등대 등불이 쓰는 글씨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쓰는 정자체. 얼마나 힘주어 눌러썼는지 밤하늘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다. 구멍마다 잔별이 들앉아 있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경상좌수영 선소 유허비

신당항 인근에 조선 시대 수군 함정이 정박하던 곳이 있다. 민락교를 건너 수영강 방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영 현대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101동과 103동 사이 어른 키 세 배는 됨직한 돌비가 정박지 표지석이다. 제목은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 선소(船所) 유허비'. 독립투사 먼구름 한형석(1910~1996) 선생이 쓴 글씨라서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

유허비엔 이곳이 조선 시대 동남해역을 방어하던 경상좌도 수군 군선이 정박했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방어 지역은 낙동강에서 경북 영해까지. 경상좌수영은 처음 감만동에 있다가 울산 개운포로 옮겼으며 임란 직전 수영으로 옮겼다. 전선(戰船) 3척, 병선(兵船) 5척, 귀선(龜船 거북선) 1척, 사후선(伺候船·정탐선) 12척을 갖춘 거진(巨鎭)이었다. 경상우수영은 통영. 서울에서 봐서 오른쪽에 있으면 우수영, 왼쪽에 있으면 좌수영이었다.

돌비 상단 시 한 편이 새삼스럽다. 시 제목은 선상탄(船上嘆). '전투 배 타던 우리 몸도 고기잡이배에서 늦도록 노래하고….' 노계 박인로 작품이다. 박인로는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가인 중 한 사람. 박인로 선상탄이 왜 여기 있을까. 임란이 끝난 지 채 10년이 안 된 1605년 여름 부산진 수군 통주사(統舟師·주사는 수군을 뜻함)로 부임해 쓴 시가 선상탄이다. 동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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