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봅시다] '부산 복싱계 산증인' 김인겸 동부종합권투체육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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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복싱 메카였던 열정이 지금의 야구 도시 만든 셈이죠"

부산 동부종합권투체육관의 김인겸 관장이 제자의 권투 자세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부산·경남지역 최고령 현역 지도자인 김 관장은 땀냄새가 물씬 풍기는 체육관에서 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제자들을 지도하며 복싱 중흥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그 화려했던 복싱의 영광을 다시 한번 부활시키고 싶을 뿐입니다." 부산 연제구 시청 맞은편에 자리한 동부종합권투체육관의 김인겸(61) 관장. 부산 복싱계의 산증인인 김 관장은 요즘도 150여 명의 제자들을 일일이 가르치는 등 부산과 경남지역 최고령 현역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예전엔 복싱이 진짜 대단했죠.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었죠. 세계 타이틀매치 권투 경기 중계를 하는 날에는 택시 기사들도 운행을 중단하고 길거리의 텔레비전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경기를 관람하는 모두가 한목소리로 함성과 아쉬움의 신음을 토해내곤 했었죠. 지금도 그런 장면들이 눈에 선합니다."

장정구·김상현·박찬희·최점환
세계 챔프 4명 키워낸 부산
1980년대 이후 쇠락의 길

부산 체육관 4인방 중 홀로 남아
150여 명 제자 가르치며
부·경 최고령 현역 지도자로
부산 복싱 명맥 유지 고군분투

최근 다이어트·생활체육 붐
복싱 입문하는 사람 늘어
"화려했던 복싱의 영광,
다시 불 지피고 싶어요"


복싱의 황금기인 1970~1980년에 대해 물어보자 김 관장의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부산의 복싱 열기를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자 그는 가끔씩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전국에서도 부산의 복싱 인기는 최고였어요. 당시 항구도시 부산의 권투팬들은 '항도복싱팬'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어요. 부산 구덕실내체육관은 우리나라 권투의 성지였어요. 중요한 타이틀매치는 모두 부산서 열렸죠. 왜 그랬을까요. 부산의 권투 인기가 전국에서 최고였으니 프로모터들이 부산서 경기를 자주 열게 된 것이지요. 경기만 열리면 모든 좌석이 매진이었어요. 암표 장사들도 극성이었죠. '항도복싱팬'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당시 부산 출신이거나 부산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세계타이틀을 거머쥔 권투 선수는 모두 4명. 라이트플라이급의 장정구, 주니어라이트급의 김상현, 플라이급의 박찬희, 주니어플라이급의 최점환 씨. 이들 가운데 김 관장은 최점환 선수를 발굴해 세계챔피언으로 키웠다. 특히 최 선수는 IBF와 WBC 등 두 곳으로부터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는 "형을 따라 체육관에 우연히 들린 최 선수를 처음 만난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지난 1986년, 세계챔피언 결정전을 통해 최 선수가 세계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린 그날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때 장정구와 유명우 선수에 이어 최점환까지 챔피언에 올라 3대 타이틀을 탈환하자 국내 복싱팬들의 반응이 정말 대단했다"고 덧붙였다.

김 관장은 현재 부산이 '야구도시'가 된 것도 예전 '복싱의 메카'였던 저력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권투 경기가 열릴 때 링 주위를 둘러싼 부산팬들은 누구라도 먼저 '으쌰 으쌰'나 '영차 영차' '○○○ 화이팅'이라고 선창하면 체육관이 떠나가라고 함께 구호를 외쳐댔지요. 그러다가 한국 선수가 상대방을 한 대 치기라도 하면 모든 관중이 벌떡 일어나 '와~'하며 환호합니다. 지금 야구의 파도타기 응원과 유사하지요. 부산이라는 곳에는 다른 지역보다 탁월한 열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열정이 과거 복싱에서 현재는 야구로 전해진 것 같아요."

하지만 국내 복싱계는 198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권투를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대폭 줄어든데다 흥행도 되지 않았다. 전국의 유명 복싱체육관들이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지역을 대표하는 복싱의 산실이었던 극동체육관, 한일체육관, 광무체육관 등도 부침을 이기지 못하고 잇따라 문을 닫았다. 당시 부산 복싱 체육관 4인방 가운데 김 관장이 운영하는 동부체육관만이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2000년대 들어 국내 복싱계는 남자 세계챔피언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김 관장의 설명이다.

김 관장은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부터 '이제는 모두가 먹고 살만한 데 주먹으로 치고 받는 스포츠를 왜 하느냐'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헝그리 스포츠'였던 복싱을 하겠다는 사람이 드물어졌다"며 "야구, 농구 같은 다른 프로 스포츠들이 인기를 얻어갈 때 복싱계가 적극적인 중흥책을 내놓지 못한 것도 주된 이유"라고 말했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새 복싱을 다이어트 수단이나 생활 스포츠로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체육관의 수도 점점 늘고 있다. 부산의 경우 복싱체육관은 부산아마복싱연맹 등록업체 26곳을 비롯해 총 40여 곳으로 증가했다.

"복싱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지만 링 위에 설 수 있는 인내의 스포츠인 동시에 예의 범절을 강조하는 운동입니다. 경기 마지막엔 반드시 상대방과 포옹을 하고, 상대방 코치에게 인사를 하는 등 매우 신사적인 운동이기도 합니다. 운동을 한 만큼 실력이 늘어나는 정직한 종목이기도 합니다. 복싱을 제대로 배운 아이들치고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청소년들의 인성 교육에 권투보다 좋은 운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 관장은 수업료를 내지 않는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기 위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권투를 시작, 경남신인선수권대회 밴텀급에서 우승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72년 지인의 추천으로 당시 양정동에 있던 한독종합체육관의 지도사범을 맡으면서 지금까지 41년째 지도자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는 이후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대통령배 전국 시도대항 복싱대회 부산선수단은 물론 동래상고 복싱부 지도코치 등을 맡아 수많은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어냈다. 또 지난 2008년부터 한국권투위원회 부산·경남지회 사무국장을 맡아 크고 작은 대회를 잇따라 개최하는 등 침체된 권투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김 관장은 "지도자들이 지금보다 한층 열정을 갖고 꿈나무를 찾아내 지도한다면 복싱은 머지않은 미래에 침체기를 벗어날 것"이라며 "그런 날이 더 빨리 올 수 있도록, 부산이 복싱의 메카라는 명성을 다시 찾도록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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