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 꼭대기에 있는 '유붕정'의 실내. 개수대가 있는 테이블, 후드가 달린 실내등까지 모두 직접 만들었다. 구석에 가스통 6개를 연결한 독특한 난로도 보인다.
'비어 있어 채워지는' 공간(空間), 그곳에 사람이 산다. 공간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한 범위를 이루고, 그 '비어 있는 사이'에 삶과 문화와 예술이 시나브로 피고 진다. 그곳 공간은 집이 되고, 도시가 되고, 세계가 되고, 우주가 된다. 비어 있어 성긴 '공간'에서 삶과 문화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공간(空間)… 그곳에 가고 싶다'를 시리즈로 엮는다.
가슴이 설레었다. '공간 여행'의 첫 주인공을 만나려니, 잠이 오질 않았더랬다.
지난달 28일 오후 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변 금수사 근처에서 알려 준 대로 작은 진입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드디어 나타난 '노란 집'. "노랗게 칠한 집만 찾아가세요. 거기 진짜 재미있어요. 가 보면 알아요." 어느 건축가가 일러 준 그대로다.
판문점 '평화의 집' 건축가 작품 방마다 아이디어 수제 물건 액자 밀면 영화처럼 다락 있고 1·2층 천장은 옥상까지 뚫어 공간 절약 계단 도입 '이색적'
그런데 큰일이다. 두리번거려 보아도 주차장에서 집으로 가는 입구가 보이질 않는다. "거기 올라타세요!" 작은 체구에 예쁜 빵모자와 갈색 가죽조끼를 척 걸친 멋쟁이 중년 남자가 소리쳤다. '올라타이소'가 아닌 서울 말투다.
리프트가 있는 유붕정.
이럴 수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앞뒤가 뚫린 리프트가 있다. 마당 한쪽을 파내고 주차장에서 집으로 곧장 올라오게 만든 것이다. '웅~.' 마당에 내려서니, 남자가 손을 꽉 맞잡는다. 주인장 김복래(56) 씨다. 마음을 끄는 인상이다.
"유붕정(遊朋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놀 유, 벗 붕. 친구들과 노는 사랑방이란 뜻입니다. 집의 테마는 '빈티지(Vintage, 오래돼도 새로운 것)와 하이테크(Hightech, 첨단 기술)'지요." 할리 데이비슨이 마당에 떡하니 서 있다.
집에 들어섰다. 은은한 조명과 거꾸로 매달린 와인 잔, 분위기 좋은 카페 같다. 바닥은 분명 단단한데, 마루처럼 나뭇결이 선명하다. 테이블에 잠시 앉으니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가 통창에 찬다. 밤이면 집을 절반가량 덮은 철 구조물에 단 LED 램프가 빛을 내면서, 지나던 사람들이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곳인 줄 알고 문을 두드린다고 한다.
그가 풀어낸 '산복도로 정착기'를 요약하자면, '대학 강의도 한 서울 건축가가 지난해에 산복도로의 매력에 빠져 잠깐씩 머물 요량으로 후배와 함께 사랑방을 만들었다가 부산에 아예 주민등록을 옮기고 눌러앉았다' 정도가 되겠다. 판문점 '평화의 집'이 그의 작품이고, 둘이 집값 등으로 3억 원 남짓 썼다.
지금은 '도스 문 도프(DOS MUN DOF)'라는 브랜드로 부산에서 향토 커피 사업을 준비 중인데, 회사 식구들은 그를 '김 교수님'이라 불렀다.
'유붕정 투어'가 시작되자, '이야, 이게 정말 가능한 거야.' 감탄사가 나왔다. 자체 제작한 '수제' 물건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즐비했기 때문이다. '스파이 하우스' 수준이다. 경륜과 샘솟는 창의력을 쏟아 내고 있었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공간절약 계단. 중간에 있는 작은 문 안쪽이 찜질방이다.
먼저 장작 난로. 가스통 6개가 천장까지 연결된 특이한 모양이다. 광고에 나오는 보일러처럼 온기가 통마다 머물게 해서인지, 온 집안이 후끈하다. 나뭇가지처럼 퍼진 특이한 책꽂이, 큰 테이블과 LED 조명이 가득 달린 후드까지 모두 직접 만들었다.
어라, 앤디 워홀의 그림이 그려진 장식벽을 슬쩍 옆으로 미니까 방이 나타난다! 1층에 방이 두 개나 숨어 있었던 것이다. 김 교수의 사무실 벽 한쪽에 걸린 액자를 슬쩍 밀치니, '007 영화'에서처럼 작은 다락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압권이다. 유럽식 '공간 절약 계단(Space saving stair)'을 도입했다. 원래 집은 실내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없었는데 천장을 옥상까지 뻥 뚫었다. 계단 중간에 작은 다락방은 황토를 바르고 전기난방을 한 '찜질방'이었다.
옥상에 올라서니, 탁 트인 전망이 그만이다. 뒷집을 위해 출입구를 투명하게 시공했다. 유붕정으로 동네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집에 페인트를 새로 칠하는 식이다. 김 교수는 부산시와 구청에 마을 재생 차원에서 '게스트하우스촌' 사업을 추진해 보라 권해 놓았다. 잠시 휴식. 해질녘 풍경을 바라보며 입에 넣은 군고구마가 달콤하게 녹아 버린다. 마음이 통하는 이와 마주 앉으니, 더없이 기분이 상쾌하다. 다음 '공간 여행지'는 무엇으로 나를 유혹할까.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사진=이재찬 기자 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