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부산 등대] 9.미포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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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머리 치켜드는 세상…자신 낮추는 중용의 자세 보여 주다

미포등대는 와우산 끄트머리에 깡마른 외양으로 서 있다. 어딘지 모르게 초라해 보일 정도다. 그러면서도 전력을 다해 등불을 깜박이고 깜박이지 않는다.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당당한 중용의 덕을 갖춘 등대로 보인다. 사진=박정화 사진가

미포등대는
내 젊은 날 읽던 문고판 등대
열아홉 스물 생의 기록
툭 떨어지듯
열아홉 스물 생의 기억
툭 점등한다
이내 꺼지고 말지라도
점등의 순간은 낭랑하다
무슨 말 써 있나 들어 보려고
해운대 바닷물 빙 둘러앉았다
손가락에 바닷물 묻혀
한 장 한 장 넘기는 문고판
중요한 대목에 꼭 불 나가고
바닷물 탄식하는 소리
포구에서 반신욕 하던 배가
그 소리 떠밀려 휘청댄다

-동길산 시 '미포등대'


등대는 중용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늘 켜져 있지도 않고 늘 꺼져 있지도 않다. 늘 켜져 있어도 등대가 아니고 늘 꺼져 있어도 등대가 아니다. 켜짐과 꺼짐 그 중간자가 등대다.

중용은 그러나 적당주의가 아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게 중용이 아니며 이쪽저쪽 기분을 두루 맞추는 게 중용이 아니다. 그런 처신은 중용이 아니고 굴신이다. 굴신이고 굴심이다. 자신을 낮추되 구부리지 않아야 중용에 가까워진다.

중용은 언제 빛나는가. 해야 할 말은 기어이 할 때 빛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기어이 하지 않을 때 빛난다. 그럼으로써 말도 빛나고 침묵도 빛난다. 이렇게 말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겠다. 말은 침묵으로서 빛나고 침묵은 말로서 빛난다고.

등대가 그렇다. 말도 빛나고 침묵도 빛난다. 깜박여야 할 때 깜박이고 깜박이지 않아야 할 때 깜박이지 않기에 등대는 등대다. 그게 대수냐고? 대수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다물었던 숱한 나여! 결정적인 순간에 주둥이를 놀렸던 숱한 나여!

미포등대는 어딘지 모르게 초라해 보이는 등대다. 꼬리 미(尾)가 들어간 이름도 그렇고 깡마른 몸집도 그렇다. 다들 머리를 치켜드는 세상에 꼬리를 자처하는 이름에서 자신을 낮추는 중용의 일단을 엿본다. 깡마른 몸집은 몇 끼 굶기를 예사로 하는 고행의 수도승이다. 세상 고뇌를 혼자 짊어진 선지자다.

미포등대는 6초에 두 번 깜박인다. 깜박이는 순간도 짧고 깜박이지 않는 순간도 짧다. 그렇지만 그 짧은 매순간 전력을 다해 깜박이고 전력을 다해 깜박이지 않는다. 등대가 깜박이면 수평선 방향에서 연꽃 등표가 깜박이고 오륙도등대가 깜박인다. 모두들 전력을 다해 깜박이고 전력을 다해 깜박이지 않는다.

등대 정식 명칭은 미포항 방파제등대. 방파제는 하나이고 포구 왼편에 있어서 붉은 등대고 홍등이다. 첫 점등일은 1999년 10월 28일이다. 등대가 낯익다. 고리원자력발전소 가까운 길천등대와 생김새 재질 색깔이 똑같다. 그러고 보니 6초에 두 번 깜박이는 것도 같다. 일란성 쌍둥이다. 쌍둥이가 산모퉁이 돌아 기장바다에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산은 와우산. 소가 누운 형상이라서 와우(臥牛)다. 소는 누워서 달맞이언덕을 품고 문탠로드를 품는다. 미포는 소꼬리 포구. 누운 소 꼬리께가 여기 미포항이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동백섬 반대방향으로 가면 유람선 선착장이 나오고 선착장에서 보면 포구와 방파제와 등대가 한눈에 잡힌다. 영화 '해운대' 주 무대가 미포이고 설경구 하지원 그 다음 주연이 미포등대다. 미포어촌계 공동활어판매장에서 우회전하면 등대가 나온다.

"고생은 돼도 내외가 하면 괜찮지요." 등을 구부정 구부린 어부가 통발 그물코를 깁고 있다. 올해 오십. 아직 장가를 못 갔단다. 놀기를 좋아해서 못 갔고 여자에 취미가 없어서 못 갔다고. 아버지 따라 11살 때부터 고기잡이를 했으니 40년 베테랑 어부다. 통발에 넣어 두는 먹이는 정어리. 문어와 장어가 든다. 새벽 두 시 반 집에서 나와 세 시면 출항한다. 앞바다에서 두어 시간 조업하고 돌아오면 그제야 먼동이 튼다. 부부가 같이 작업하면 통발을 5백 정도 놓고 자기처럼 혼자 하면 2백밖에 못 놓는데 5백이면 수입이 괜찮다고 한다.

포구에 정박한 배는 대개가 연안어선이다. 멀리 나가지 않고 가까운 바다 당일치기 고깃배가 포구를 메운다. 1, 2톤 통발어선이며 4, 5톤짜리 자망어선이 보인다. 자망은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려서 잡히도록 하는 그물. 배는 반신욕 중이다. 수면에 상반신을 드러낸 갈매기처럼 배 아래를 푹 담그고 있다. 몸이 굳은 건지 때가 많은 건지 탕을 나갈 생각을 않는다. 저렇게 새벽 두세 시까지 갈 모양이다.

"풍랑주의보만 안 불면 매일 열려요." 몇 년 전 신축한 회 타운 건물 모퉁이. 수건을 둘러쓴 두 할머니가 해바라기를 한다. 새벽에 배가 들어오면 활어를 받아서 횟감으로 파는 할머니다. 모퉁이 공터는 새벽 장터. 풍랑주의보만 안 불면 새벽 5시 반부터 오전 11시까지 장이 선다. 순전히 자연산 어물전이다. 한 접시 2만 원 안팎이다. 말만 잘 하면 1만 원짜리도 가능하다. 초장 값은 따로다. 낮술에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지만 새벽 술에 취하면 더 그렇다. 떠오르는 해에다 대고 삿대질을 해 댄다.

유람선 선착장 동백88호는 출항하기 직전이다.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가 뱃전에서 새우깡을 내밀자 갈매기가 떼거리로 몰려든다. 몰려들어 내미는 먹이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다. 수면으로 떨어지는 먹이를 낚아채는 재주가 정일품이다. 주는 걸 받아먹다가 버릇 되면 살아나가기 힘들 텐데 싶다가도 거둬들인다. 저것 또한 저들의 생존방식이고 저들의 재주다.

동백88호가 후진한다. 뱃머리를 우측으로 트는가 싶더니 오륙도 쪽으로 냅뜬다. 여기서 오륙도까지는 왕복 1시간. 요금이 좀 세다. 어른 1만 2천900원 아이 1만 2천 원. 유람선 후미 태극기가 펄럭이고 뒤좇는 갈매기 날개가 펄럭인다. 유람선이 일으키는 물살 너머로 해수욕장이 보인다. 백사장 모래에 파묻어 놓곤 찾지 못한 기억들. 찾지 못하고 까먹은 젊은 날 기억들. 미포등대 아래에 서면 태극기가 펄럭이듯 갈매기 날개가 펄럭이듯 젊은 날 기억이 펄럭인다.

동백섬 너머는 고층 아파트. 내 아는 사람 몇이 저기 산다. 한번 놀러 오라는 인사들을 진작 받았는데 아직 가 보진 못했다. 낮엔 위압적이지만 어둠이 깊을수록 아파트 불빛은 깊어진다. 저 불빛인들 시가 되지 않으랴. 켜진 시간이 길고 꺼진 시간이 길어서 그렇지 늘 켜져 있지도 않고 늘 꺼져 있지도 않는 아파트 불빛. 등불이라면 등불이겠다. 저기선 여기 등대가 어떻게 보이는지 한번 놀러 가 봐야겠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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