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의 Space] '人+間' 99번째 풀스토리- 인제대백병원 백낙환 이사장, 그가 존경받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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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은 다소 아팠다. 하지만 뜻을 세워, 달려온 인고의 세월이었다. 폐허 속에서 재건한 백병원, 인제대학교 설립, 그리고 해운대백병원에 이르기까지 총 5개 병원을 운영하면서 그는 의학자, 교육가, 경영자로서 1인 다역을 소화했다. 그는 실천하는 나눔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아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에너지가 넘친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영원한 청년’이라고 말한다. 그는 학교법인 인제학원 및 인제대학교 백병원을 반석에 올려놓은 백낙환(87·의학박사) 이사장이다. 이제, 그를 만나러 간다.


인터뷰 내내 따스한 한 줄기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길을 달리는 한, 빛은 있다’고 하더니 학교법인 인제학원·인제대학교 백병원 백낙환 이사장의 인생이 그랬던 것 같다. 사랑과 덕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인덕제세’를 좌우명으로 내세울 만큼, 그의 인생은 베풀고, 더불어 살아온 세월이었다.  <사진=이재찬 기자>

두 번의 요청 끝에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였다.

지난해 ’인제대학교 백병원 설립 80주년’을 기념해 인터뷰를 추진하던 중 ’천하의 강골’이라던 백낙환(87·의학박사) 학교법인 인제학원·인제대학교 백병원 이사장이 평생 처음 입원이란 걸 하게 되면서 미뤄졌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며 부상을 입었는데 나이가 있어서인지 몸 회복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었고, 다시 한 번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백 이사장이 사재를 털어 24년째 운영 중인 ’인당仁堂)장학금 전달식’이 지난 7일 인제대학교에서 열려 며칠 동안 부산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뷰는 2월 8일 해운대백병원 VIP병동 접견실에서 가졌다. 2010년 3월 개원한 해운대백병원은 지난해 MBC에서 방영된 의학드라마 ’골든타임’의 의학자문 및 주요 촬영장소로 제공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생후 5개월에 어머니 여읜 후
할머니·할아버지 품에서 자라
중학 진학 후 서울 백부댁 기거
나누며 사는 삶의 자세 배워

해방 되자 큰아버지 백인제 박사
병원 운영 모은 재산 사회환원 결심
1946년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서울, 부산을 오르내리느라 많이 피곤하시죠!
"병원이 여러 개라서 할 수 없죠. 그저께 내려와서 해운대백병원에서 잤어요."

-병원에서 주무셨다고요?
"집사람은 먼저 올라갔어요. 사실, 병원이 집이에요."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안기찬(부산백병원 정형외과 주임교수) 홍보실장이 부연설명을 했다.
"아픈 사람이 오는 병원이니까 더 편하시죠. 건강하실 때도 그러셨어요. 요즘은 부산백병원에 오셔도 호텔 같은 데 안 주무시고 병원 집무실 옆에 마련된 방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하시고, 또다시 일 보시고 그래요."

-오늘도 운동을 하신 건가요?"
"새벽 네다섯 시면 눈이 떠져요. 주로 산보하고 조깅하고 맨손체조를 해요. 주말엔 산엘 오르고요. 요즘은 몸이 안 좋아 그렇게 못하지만 오늘은 지하주차장을 두 바퀴 돌았어요."

안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병원이 다섯 개잖아요.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상계백병원, 일산백병원, 부산백병원, 해운대백병원 그리고 인제대학까지. 한 군데씩만 다녀도 1주일이 훌쩍 지나가요. 오실 때마다 보고도 직접 다 받으세요. 교수·교직원 면접은 물론 간호사까지 정규 직원은 이사장님께서 전부 보세요."

-모든 일을 직접 다 챙기신다고요? 조금씩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런 생각이 왜 안 들겠어요. 힘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병원이라는 게 아주 복잡해서 환자도 생각하고, 수익도 감안해 수지를 맞춰야 하거든요. 요즘은 서울의 큰 병원들도 수지 맞추기가 힘든가 봐요. 하긴, 병원 경영은 수지를 맞추는 거지, 돈을 벌기 위한 건 아니죠."

’병원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는 백 이사장의 말에 힘이 실렸다. 


인터뷰 도중 취재기자에게 자신이 쓴 책을 선물하기 위해 직접 사인을 하고 있는 백 이사장. 사진=이재찬 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 법인, 백병원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서 자신을 의사의 길로 이끌어준 백인제 박사야말로 오늘날의 백낙환 이사장을 있게 한 주인공이다. 인제대학교 이사장 집무실 벽에 걸려 있는 백인제 박사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백 이사장. <사진=인제대 백병원 제공>
그러고 보니 인제대학교 백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 법인이다. 
백 이사장은 지난 2007년 펴낸 자신의 저서 ’영원한 청년정신으로’(한길사)에서 재단법인 설립 당시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워낙 우리 집안이 재물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정신을 이어왔다고는 하지만 살던 집을 제외한 전 재산을 재단법인으로 선뜻 내놓는 큰아버지의 대범함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백 이사장의 회고는 이어졌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큰아버지께서 늘 우리에게 하던 말씀이었다. 큰아버지는 가진 자들의 베풂에 대한 사회적 책임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후손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큰아버지의 이런 나눔의 실천이 지금의 인제학원과 재단법인 백병원까지 내려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보고 큰다’고 했던가, 백 이사장에게 있어 백인제 박사는 또 한 분의 아버지였다. 생후 5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귀국한 뒤 재혼을 해서 지방 근무를 한 터라 함께 산 기억이 별로 없다. 대신, 조부모 품에서 자라다가 서울의 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큰아버지 댁에 기거하게 되었다. 나중에 공과대학으로 진학하려던 그에게 의대 진학을 권유한 것도 백인제 박사다. 백 이사장은 백인제 박사를 "내 인생의 반석"이라고 부른다. 


해운대백병원 백 이사장 집무실 창 밖으로 해운대 장산이 보인다.   <사진=이재찬 기자>         


사진 액자 속 주인공은 백 이사장의 할아버지 백희행 씨. 이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책꽂이 좌우 칸과 아래 칸에 각각 다른 사진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사진=이재찬 기자>


인제대 건학이념 인덕제세(仁德濟世·어짊과 덕으로 세상을 구한다)와 함께 인제대 백병원 정신으로 강조되는 인술제세(仁術濟世·참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 백 이사장 큰아버지 백인제 박사,
할아버지 백희행 옹, 할머니 청주 한 씨 사진 액자가 책꽂이 세워져 있다. (사진=아이폰 촬영)

다동(多動)·소식(少食)·
금연(禁煙)·금주(禁酒)

사진 촬영을 하느라 인터뷰 장소를 옮겼다.

층을 달리한 백 이사장 집무실 공간.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 쪽으로 장산이 한눈에 보이는가 싶더니 벽 쪽 책장에 세워둔 네 개의 포토 액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백인제 박사였다. 그리고 할아버지 백희행과 할머니 청주 한 씨 사진이다. 세 분 모두 그에겐 부모를 대신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장, 의과대학생들에게 둘러싸인 백 이사장이다. 지난해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셨는데도 여전히 학생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으신가 봐요?
"환자들도 그렇고, 학생들과는 계속 접촉해야죠. 얼마 전까지도 의대 본과생, 전공의, 교수들로 구성된 외과 팀 보고는 직접 받았어요. 제가 달리 ’팔방미인’이 아닙니다. 하하- 어느 분이 저보고 ’팔십 대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표현했던데, 맞는 말입니다. 한창 때 제 일과는 철학자 칸트 못지않았어요.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지만 30시간 이상으로 활용했으니까요. 부산만 해도 지금은 한 달에 서너 번밖에 못 내려오지만 그전엔 거의 매주 왔어요."

-젊게 사시는 비결이라도 있나요?
"’다동(多動)·소식(少食)·금연(禁煙)·금주(禁酒)’를 실천해 보세요. 다른 건 모두 자신을 억제해야 하지만 운동은 행할수록 더 좋아지니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이루더라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없다잖아요. 작년에 평생 처음 입원이라는 경험을 하고 나서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청년’이란 말도 아주 좋아해요. 인당장학회나 인제청년상을 만든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1961년 30대 중반 원장직무대행
큰아버지 납북·IMF 등 위기 겪고
5개 병원 4천여 병상 규모 갖춰

"돈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냥 놔두고 싶은 생각 없어
좋은 데 쓰면 그게 보람"

많이 움직이고 적게 먹으며 건강 다져
지난해 입원, 건강 소중함 새삼 느껴

남북통일 되면 북한에 개원 꿈
지난달부터 개성공단서 진료



교육과 청년사랑으로 세상을 구하리라

백 이사장의 ’청년 사랑’은 이미 알려진 그대로다. 

지난 1989년 인제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한 뒤 학생들을 숱하게 만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그 이듬해 사재를 털어 ’인당장학회’를 만들었다. 그동안 2천266명의 고교생, 대학생, 대학원생에게 모두 22억 1천500만 원가량의 장학금을 전달해 왔다. 지난해부터는 전공의들이 기피하고 있는 진료과를 공부하는 백병원 수련의들에게 석사 과정 대학원 학비 전액도 지원하고 있다.

2011년에는 ’인제 청년상’도 만들었다. 인류사회의 여러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인류와 민족의 밝은 미래를 가꾸어 갈 젊은이들을 위해 제정한 상이다.

백 이사장은 그 밖에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를 비롯해 장기려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우리나라 대표적 지도자들의 정신을 널리 보급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이 몸에 밴 것 같습니다.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냥 놔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좋은 데 쓰면 보람이 있잖아요. 절약도 마찬가지예요. 절약은 몸에 배어야지 억지로는 안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검약을 습관적으로 해야 할 겁니다. 저는 보직교수들과 식사를 해도 늘 일품요리를 주문해요. 음식값은 반드시 개인카드를 사용하지 법인카드는 안 써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학교로 옮겨갔다.

"우리 학교 교훈이 뭔지 아십니까? ’정직·성실·근면’이에요. 요즘 보기 드문 교훈이죠. 학교를 개교하면서도 어르신이 남긴 유지를 떠받드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병원의 ’인술제세(仁術濟世·참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 인제대의 ’인덕제세(仁德濟世·어짊과 덕으로 세상을 구한다)’라는 건학이념도 그렇고, 고 이태석 신부의 뜻을 기리는 각종 사업을 하니까 가끔은 미션스쿨로 오해도 받아요."

이런 덕성을 강조하고, 늘 챙기는 덕분일까. 흔히 대형 병원이라면 터져나오는 약품 납품 등과 관련한 리베이트나 교수 채용 비리에 관해서도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왜 스트레스가 없었을까.

-화가 날 때도 참 많았을 텐데 어떻게 다스리세요?
"화가 날 때 많죠. 처음 병원 할 때가 그랬고, 젊었을 때는 더더욱요. 다 철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철이 없었다고요? 사람은 철이 나면서 자기 안의 것들을 비로소 남에게 나눠준다고 하던데, 나누고 베푸는 삶을 보면 오히려 일찍 철이 든 건 아닌가요?
"자꾸 화를 내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렇더군요. 화내면 화내는 만큼 손해 본다는 생각요. 그래서 가급적 화를 안 내기로 했어요."

-백 이사장님께선 혹시 특별히 존경하는 분이 계신가요?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때 애국지사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김구, 안창호, 서재필 선생 같은 분을 존경해요. 그래서 지금도 안창호 기념사업회 같은 데 회장도 하고 그래요."  

외과의 출신답게 외과보고는 매달 직접 받는다는 백낙환 이사장.
해운대백병원 외과 실습생(서브인턴)들을 교육 중인 백 이사장<사진=인제대학교·백병원 제공>
앉아있는 사람들은 외과 교수들(사진 아래)<사진=인제대학교·백병원 제공>

백병원의 운명을 짊어지고

병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다. 여러 차례 위기도 겪었다.

가장 첫 시련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백인제 박사가 아버지(백붕제 변호사)와 함께 납북되면서다. 설립 초기 30여 병상 규모로 출발해 이후 최대 100병상까지 증가하며 당시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였던 백병원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서울 곳곳에서는 세브란스병원, 가톨릭성모병원 등 대규모 종합병원이 신설되었다. 유능했던 의료진도 점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961년 1월, 서른다섯을 갓 넘긴 나이였어요. 원장 직무대행으로 백병원 운영을 맡게 되면서 현대식 종합병원 건설로 제2의 도약을 선언했습니다. 정면 돌파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어요."

천신만고 끝에 1975년 서울백병원이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되고 현대화되자 수익도 증가했다.

두 번째 위기는 일산백병원을 착공하고 얼마 안 돼 닥친 IMF 구제금융과 함께 찾아왔다.

"IMF 때도 정말 눈앞이 캄캄했죠. 하지만 위기는 기회였어요. 그때 배운 교훈이 ’시련을 두려워 하지 마라. 당신이 상상한 열 개 중에서 한두 가지밖에 일어나지 않는다’였어요."

이후 백인제 박사가 꿈꾸었던 교육 분야로의 진출은 1979년 학교법인 인제학원을 설립하면서 현실화됐다. 이때 의과대학과 부산백병원을 개원한다. 그리고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선수촌 전담 병원 운영 등을 거쳐 해운대백병원까지 5개 병원 4천여 병상 규모의 한국 사립병원의 대표적 주자로 성장하게 된다. 병원 정직원만 6천500명에 이른다. 또한 80명 정원의 인제의과대학으로 출발한 인제대도 1989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현재 8개 단과대학에 33개 학과, 13개 학부에 1만 4천여 명, 일반대학원 및 특수대학원에 1천200여 명의 규모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왜 부산이었을까?

군대 생활과 피란 시절을 보낼 때 부산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함에 더해 의과대학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당시 서울에는 의과대학이 7개나 있어 의대 신설 허가가 나오지 않았고, 부산·경남 지역에는 부산의대 한 곳뿐이었다. 부산지역 정서도 고려됐다. 외지인에 대한 지역 주민과 의료 관계자들의 포용력도 고려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쟁 때 피란 와서 다들 고생했잖아요. 부산분들한테 신세도 많이 졌어요. 안방 건넌방 문간방 할 것 없이 다들 한 세대처럼 살았어요. 서울, 이북, 전라도 할 것 없이 다 함께 어우러졌고,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우리나라도 이만큼 성장했어요. 남한만 해도 경제권이 세계 10위권인데, 그건 기업들만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노력해서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해요. 의사로선 부산·경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이 병원밖에 더 있겠어요. 해운대백병원이 마지막이에요."


계속되는 잔기침으로 몇 번이나 인터뷰가 중단되긴 했지만 최선을 다하는 백 이사장.  <사진=이재찬 기자>


인술 통해 남북화합에도 기여

-더 이상 병원 증설은 안 하시는 거네요.

"없어요. 하지만 남북통일이 된다면 고향 북한(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에는…. 거긴, 여기랑 사정이 많이 다르니까요. 현재 수액공장은 잘 운영되고 있고요, 지난달부터 개성공단 남측 주재원을 상대로 한 진료가 시작됐어요. 통일부가 지난 연말 26억여원의 예산을 투입해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별관 건물을 리모델링한 뒤 ’개성공업지구부속의원’을 개원했는데 위탁운영 사업자로 일산백병원이 선정됐거든요. 기존 남측 자원봉사단체인 ’그린닥터스’가 철수한 뒤 위탁운영 사업자로 일산백병원이 선정됐거든요. 손익만 생각하면 손을 댈 수 없지만 통일한국에 대한 염원인 거죠."

-올해 목표는 이미 세우셨겠죠.신년교례회 땐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지난해가 우리 백병원이 개원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한 해였다면 올해는 100년을 향해 재도약하는 계기로 삼자고 했어요. 그리고 당부했어요. 통일로 인한 상생(相生), 자연과의 상생, 인제학원 구성원의 협력을 통한 상생을요. 저 역시 이사장으로서 ’정도경영, 투명경영, 효율경영’의 원칙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어요."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요. 특히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의사라는 직업은 봉사하는 자리예요. 돈을 버는 자리가 아니죠. 병원은 병을 고쳐주는 곳, 사회에 봉사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나보고 왜 굳이 힘들게 사느냐고 묻는데요. 이상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에요. 또한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어요.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네요. 보이즈 비 앰비셔스(Boys, be ambitious!)."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약간은 돌발적인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이사장님 앞으로는 집 한 채밖에 재산이 없다는 데 정말입니까?
"난 실제로 집 하나밖에 없어요."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주요 연보


1926년 9월 27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7년 생모 안숙은 사망

1932년 백인제(큰아버지) 박사, 백인제 외과의원 개설(우에무라 외과의원 승계)

1939년 서울로 상경

1940년 백인제 박사 댁으로 들어감.

1946년 9월 경성제국대학교 의예과 수료

1947년 결핵으로 본과 2년 휴학

1950년 7월 19일 백인제·백붕제(아버지·변호사)형제 인민군에게 납북

1951년 9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55년 9월 1일 박숙란과 결혼(슬하에 2남2녀)

1960년 6월 외과 전문의 자격취득

1961년 1월 백병원 원장 직무대리로 취임

1962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 취득

1963년 5월 제3대 백병원 원장 취임

1975년 3월 서울백병원 완공

1979년 학교법인 인제학원 및 인제의과대학 설립

1979년 3월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1회생 입학

1979년 6월 1일 부산백병원 개원

1984년 8월 인제의과대학 일반외과 주임교수

1989년 2월 인제대 종합대학교 승격 및 총장 취임

(1999년 12월 총장 사임)

1989년 8월 15일 상계백병원 개원

1990년 사재 1억 9천만 원으로 인당장학회 설립

1999년 12월 10일 일산백병원 개원

2000년 6월 제1차 방북(김대중 대통령 수행)

2001년 1월 부산한미병원 인수

2001년 3월 동래백병원 개원(2010년 폐원)

2005년 제2차 방북(정성수액약품공장 준공식 참석)

2010년 3월 25일 해운대백병원 개원

2011년 인제청년상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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