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부산 등대] 8.마린시티등대
찬란한 마린시티…등불 끄고 숨은 이유는 바다 향한 배려심
마린시티등대는
만난 지 100일을 자축하는
와인 등대
꼭대기 생긴 게 와인 마개 같아서
꼭대기에 등불이 들어오면
마개 따는 소리가 난다
바다 저 쪽은 동백섬
갈매기가 동백 꽃잎처럼 뚝뚝 떨어진다
만난 지 100일 되는 동백갈매기
이제나저제나 마개 따는 소리가 날까
행여나 그 소리 놓칠까
입 꾹 다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손잡이 같은 부리
길 대로 길어서
축배의 잔 들기 좋다
- 동길산 시 '마린시티등대'
해가 지나는 자리는 달이 지나는 자리. 해가 지나면서 비추는 바다는 달이 지나면서 비추는 바다. 지금은 오후 두 시 무렵. 햇빛 받아 반짝이는 저 바다가 곧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바다다. 햇빛 달빛 받아 반짝이는 수면은 순우리말로 윤슬. 반짝이는 저 바다는 윤슬의 바다다.
바다가 햇빛 달빛만 받아 반짝일까. 불빛 받아 반짝이는 바다도 넓게 보면 윤슬이다. 등대 불빛이 비추는 바다, 밤배 불빛이 비추는 바다 모두가 윤슬의 바다다. 더 넓게 보면 등대 불빛에 반짝이고 밤배 불빛에 반짝이는 사람의 마음 또한 윤슬이지 싶다.
가까이 가지 못하기에 더 애절한 것들. 사람이 그렇듯 등대가 그렇다. 갈 수 있는 등대보다 갈 수 없는 등대가 훨씬 많다. 무인도 섬에 있어서 가지 못하고 철조망 쳐져 가지 못한다. 애절해서 더 반짝이는 것들. 가까이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마음은 더 반짝이고 가까이 가지 못하는 등대가 있어 마음은 더 반짝인다. 윤슬의 마음이 원래 그렇다.
마린시티등대는 철조망 쳐진 등대. 철조망 쳐져 가까이 가지 못하는 등대다. 등불이 점등하지 않아 해도엔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바뀐 도로명으로 마린시티 1로에 있다고 임의로 붙인 이름이 마린시티등대다. 등대는 등대인데 점등하지 않는 등대. 그래서 오히려 애절한 면이 있다. 그런 면이 더 다가가게 하고 더 들여다보게 한다. 동백섬 건너편 마린시티 고층아파트 즐비한 바닷가 방파제 끝단에 있다.
등대는 묵은 티가 난다. 정감이 가는 등대다. 군데군데 녹이 슨 게 연도가 제법 된 와인 같다. 생긴 것도 와인 병이다. 점등하지 않는 등명기일망정 등대 꼭대기 턱 하니 자리 잡은 게 영판 코르크다. 영판 병마개다. 등불이 들어온다면 마개 따는 소리가 날 것 같고 그 소리에 밤바다가 깜짝깜짝 놀랄 것 같다. 방파제 바로 안쪽 두어 척 어선은 느긋하다. 깜짝 놀랄 일이 없는 등대란 걸 이미 아는 듯 등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저길 넘어서 왔지요." 노인 한 분이 철망 담장 안쪽에서 미리 넘겨 놓은 낚시도구를 챙긴다. 출입문이 있으면 나도 들어가 보려고 물어보자 철망을 넘어왔단다. 굳이 철망을 칠 필요도 없지 싶고 등대 주변 철조망을 칠 필요도 없지 싶은데 들어오면 고발 조치한다는 경고문까지 보인다. 이유는 있을 터. 낚시하기엔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한다. 좋게 생각하면 사람도 보호하고 등대도 보호하잔 마음일 터. 하나뿐이라 안 그래도 외로운 등대가 더욱 외롭게 됐다.
등대 너머는 오륙도 다섯 섬 여섯 섬. 등대와 오륙도 사이 바다는 햇살이 비춰 반짝댄다. 백금 같고 순은 같은 윤슬의 바다다. 햇살은 해가 쏘아 대는 화살. 바다는 햇살을 얼마나 맞았는지 성한 데가 없이 반짝인다. 얼마나 맞았는지 신음소리를 토해 낸다. 밧줄을 길게 늘어뜨려 해안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뗏목이 떠 있고 가마우지 몇 마리 밀려오는 신음소리를 피해서 뗏목에 앉아 있다.
갈매기는 맷집에서 가마우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가마우지가 차지한 뗏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동백섬 동백에서 툭 떨어진 꽃잎처럼 점점이 떠다닌다. 물살에 떠밀려 떠오르기도 하며 내려앉기도 하며 긴 부리로 깃을 파고든다. 동백갈매기 점점이 흩뿌린 바다 저 쪽은 동백섬 선착장. 지금은 동백이 꽃을 피우는 철.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오고 있다.
마린시티등대를 보며 걷는 길은 갈맷길.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부산엔 갈맷길이 있다. 갈매기를 보며 걷는 길이 갈맷길이고 갈맷빛 짙은 초록을 보며 걷는 길이 갈맷길이다. 봄꽃 화사한 옷을 차려 입은 여인이 마린시티 갈맷길을 경쾌하게 뛰어간다. 목줄 달린 애완견이 뛰어가는 여인을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는다. 생머리 찰랑거리는 여인 뒤태를 훔쳐보는 애완견 눈빛이 윤슬이다.
"있는 줄도 몰랐어요." 등대 방파제 안쪽은 부산 최고의 관광유람선이란 티파니21 선착장. 최고란 유람선이 다니는 길목에 있는 등대가 마린시티등대다. 유람선사에 근무하는 정대용(30) 주임은 등불이 작동하지 않아 존재감을 모르고 지냈단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의 비애. 사랑도 그런 면이 있지 않던가. 사랑엔 이런 면도 있다. 있을 땐 있는 걸 모르다가 없어지고 나서야 있었던 걸 알게 되는.
티파니21은 2층 유람선. 파티 기념식 결혼식까지 가능한 해상투어 크루즈란다. 점심 저녁 밤 나누어서 부산 앞바다를 2시간가량 오간다. 가덕도 동두말에서 기장 대변까지 오가기도 하고 오륙도 승두말에서 청사포까지 오가기도 한다. 옥상 난간에 내건 현수막이 임자를 만난 듯 펄럭댄다. '해피 밸런타인데이'. 참가 요금이 꽤 세다. 우리 이름도 많은데 왜 하필 밸런타인이냐고 따지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윤슬처럼 반짝이는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날로만 받아들이자. 오늘이 그날이고 유람선 행사는 17일까지.
마린시티는 바다의 도시. 낮에는 바닷가 고층아파트가 바다에 비치고 밤에는 아파트 불빛이 비친다. 밤낮으로 비쳐 대니 바다는 정신이 얼얼하겠다. 그러나 바다의 품은 가없이 넓고 속은 가없이 깊다. 바다의 도시 마린시티등대는 청출어람이다. 바다보다 넓고 깊다. 자기라도 밤바다를 편하게 해 주자는 요량으로 제 몸의 등불을 아예 꺼 버린 등대가 여기 등대다. 있는 줄도 모르게 꼭꼭 숨어 버린 등대가 여기 마린시티등대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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