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부산 등대] 7.하리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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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엉킨 실타래 푼 영도 패총을 닮아서 매끈한 '하리등대'

하리등대는 고대사 엉킨 실타래를 푼 패총 유적 위에 서 있다. 그래서일까. 등대 아래에 서면 사람도 마음 밑바닥이 흔들려 잊고 지내던 기억이 뿌옇게 일어나고 잊은 줄 알은 기억이 뿌옇게 일어난다. 사진=박정화 사진가

하리등대는 조개등대

땅을 다져서 기둥을 세우듯

조개껍질을 다져서 세운 등대

등대 아래를 파 보면

다문 입 벌리느라 조개에 묻은

할머니의 할머니 손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손때

저 손때가 나를 낳았구나

저 손때가 나를 길렀구나

어떤 껍질엔 속살이 붙어있어

알진주를 키우기도 하려니

진주가 다칠까 봐

눈으로 살살 긁으면서

등대 아래를 파 보는 사람들

생의 뿌리를 파 보는 사람들

- 동길산 시 '하리등대'



등대는 서늘하다.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숫돌에 잘 갈아 놓은 칼이다. 손을 대는 족족 베이고 마음을 대는 족족 베인다. 베여 핏물이 든다. 베일 것 알면서도 사람들은 등대를 찾는다. 찾아서 손을 대고 마음을 댄다. 등대 아래 서서 입술을 깨문 저기 저 사내. 입술에도 핏물이 들었으리라.

등대 아래 서면 사람도 등대를 닮는다. 서늘해져서 마음 밑바닥을 건드린다. 오래전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억들. 잊고 지내던 기억이 뿌옇게 일어나고 잊은 줄 알은 기억이 뿌옇게 일어난다. 등대에 손을 대고 마음을 대어 기억을 떠올리는 저 사내. 기억에도 분명 핏물이 들었으리라.

하리등대는 조개등대. 할머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손때가 묻은 조개껍질 위에 세운 등대. 조개 캐서 키워 낸 자식이 이어지고 이어져 오늘의 내가 있다. 하리등대는 저 오랜 시원을 건드리는 등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돌아보게 하는 등대. 잊고 지내던 기억을 떠올리고 잊은 줄 알은 기억을 떠올리는 등대다.


동삼동어항 방파제등대. 하리등대의 정식 명칭이다. 동삼동은 영도 동쪽 세 마을, 상리 중리 하리를 가리킨다. 셋 가운데 가장 아랫마을이 하리다. 영도는 섬. 섬에서도 벽촌인 하리지만 영도는 물론이고 부산은 물론이고 한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에서 그 이름이 높다. '세계를 내 품에 미래를 내 손에!' 세계로 나아가고 미래로 나아가는 국립 한국해양대를 품은 곳이 여기 하리고, 신석기 유적 패총이 잔뜩 출토되면서 고대사 엉킨 실타래를 푼 곳이 여기 하리다.

"요 앞에 요 잔디밭 아입니까." 해양대 입구 반듯한 건물은 패총전시관. 신석기 생활이 어땠는지, 패총이 뭔지 전시한다. 가지런하게 되감긴 역사의 실타래! 전시관을 둘러본 뒤 패총 출토 자리를 묻자 안내직원은 곧장 통유리 바깥을 가리킨다. 직원이 가리키는 바깥은 잔디밭. 잔디밭 사이로 산책로가 아담하고 산책로 저 너머 방파제 흰 등대가 당당하다. 하리등대다.

고백해야겠다.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패총이 뭔지 제대로 몰랐다. 사람이 죽으면 흙 대신 조개껍질로 묻은 게 패총인 줄 알았다. 다 먹고 내다 버린 조개껍질이 재이고 재여 패총이란 걸 학교 마치고 안 것이다. 동삼동 패총은 이 일대가 조개 천지란 걸 입증한다. 조개가 겹겹이 재여 조개 무덤이 되고 다시 세월이 겹겹이 흘러 조개 무덤 위에 집 짓고 살았단 걸 입증한다. 땅을 다져 집을 짓듯 조개껍질을 다져 지은 등대가 하리등대다.

"매립한다 아인교." 등대 가는 길이 질퍽거린다. 바닷물인지 빗물인지 고여서 신발을 버린다. 무슨 공사 중이다. 매립공사 중인데 한참 됐다고 하리 입구 분식집 아주머니가 귀띔한다. 얼큰한 라면으로 속을 푼다. 매립지 맞닿은 수면엔 오일펜스가 떠 있고 황색 등부표는 여기가 공사구역임을 알린다. 등부표는 달관의 경지다. 물살이 이리 흔들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면 저리 흔들린다.

방파제 오른편은 해양대. 그 너머로 오륙도방파제 흰 등대가 보이고 그 너머로 오륙도등대가 보인다. 하나는 방파제에 있는 무인등대고 하나는 섬에 있는 유인등대다. 등대와 등대 사이로 들어오는 군함은 듬직하다. 백운포 해군작전사령부로 진입하는 군함이다. 작년 들어선 국립 해양박물관도 보인다. 통유리 층층의 건물이 조개껍질 층층이 재어 놓은 패총 같다. 보이는 걸 어떻게든 패총과 연관 지으려는 이 경박함! 학교 다닐 땐 몰랐다가 뒤늦게 알아 놓고선, 쯧쯧. 늦게 든 바람이고 늦게 배운 도적질이다.

등대는 매끈하다. 밀물이 밀려오면서 모를 깎고 썰물이 밀려가면서 모를 깎아 표면이 매끈해진 백사장 조개껍질 같다. 이것 역시 늦바람이고 '늦도적질'! 오른편 방파제 등대라서 흰색이고 녹등이다. 5초에 한 번 깜박인다. 첫 점등일은 1991년 12월 16일. 등탑에 난 창문은 하나, 원형이다. 철제 출입문은 묵중하다. 일단 들어가면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은 철문이다. 저 안에서 용맹정진하는 자 눈빛이 등불이리라.

등명기는 투명유리 등롱에 있다. 등롱은 지붕 장식이 특이하다. 다른 데선 못 보던 거다. 언뜻 보면 손잡이 같다. 손잡이 장식이 둥근 지붕을 따라서 박혀 있다. 사람 미끄러지지 말란 손잡이인가 물새 미끄러지지 말란 손잡이인가. 나도 누군가에겐 손잡이였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다 곧 거둬들인다. 자신이 서지 않는다. 괜히 해 본 생각이 나를 미끄러뜨린다. 바다로 처박는다.

못 보던 장식은 또 있다. 핸들 모양 조타기 장식이다. 손잡이 위에 있다. 조타기는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조종하는 장치. 배가 나아가듯 하리등대도 나아가고 싶으리라. 조타기 둥근 핸들을 따라 숨구멍 콧구멍이 뿅뿅 나 있다.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등대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숨구멍 콧구멍을 저리도 내었을까. 등탑은 원통형. 폭은 아래와 위가 약간 다르다. 위가 좁다. 좁아도 아주 많이는 좁지 않고 약간만 좁다. 사람도 저래야 하지 싶다. 속과 겉이 똑같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 터. 달라도 아주 많이는 다르지 말고 약간만 달라야 하지 싶다.

수평선 구름은 홍조다. 불그레하다. 합방을 앞둔 신부의 볼이다. 해가 져 첫날밤이 다가오니 구름은 부끄러운 기색이다. 부끄러워하는 구름을 바다는 날름날름 넘본다. 캄캄해지면 방문을 꼭꼭 닫아걸 심보다. 영도입구에서 태종대 가는 버스를 타고 해양대 입구에서 내리거나 다음 정류소 하리에서 내리면 된다. 패총전시관에 가 보려면 해양대에서 내려야 한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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