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부산 등대] 5. 길천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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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외지고 낮은 곳에 서서 지혜의 등불로 세상을 조명하다

길천등대는 부산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외등대여서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자리는 육지에선 가장 낮지만 바다에선 가장 높지 않은가. 등대는 마치 '내가 중심이다'라고 외치는 듯 당당하기만 하다. 사진=박정화 사진가

나는 끝

뜨거웠던 생애의 중반

나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으나

지금은 끝

더 이상 밀려날 데 없는 세상의 끝

그러나 끝에 이르러

비로소 중심이 되었으니

내가 이른 곳은

육지와 바다 한가운데

그리고

육지에선 가장 낮고

바다에선 가장 높은 곳

그리하여 나는 중심이다

깃발 같은 등불 펄럭이며

가장 낮아서

가장 높아진

- 동길산 시 '길천등대'


등대는 경전이다. 볼수록 보고 싶은 문장이다. 들을수록 듣고 싶은 말씀이다. 여백으로 빽빽한 경전을 누구는 손으로 더듬고 누구는 눈으로 더듬는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새겨 두고 싶은 문장을 누구는 손으로 밑줄 긋고 기억하고 싶은 말씀을 누구는 눈으로 밑줄 긋는다. 손때가 묻어 눈때가 묻어 등대는 반들댄다.

등대는 겸손하다. 방파제 등대가 있는 곳은 육지 끄트머리. 그리고 육지에서 가장 낮은 자리. 세상의 중심을 탐하지 않으며 높은 자리를 넘보지 않는다. 볼수록 보고 싶은 문장과 들을수록 듣고 싶은 말씀은 저 겸손에서 나온다. 가장 외지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환한 지혜의 등불이 등대다.

길천등대 역시 육지 끄트머리 가장 낮은 등대. 손때 눈때가 묻어 반들대고 지혜의 등불이 스며들어 반들댄다. 길천등대는 육지 끄트머리이면서 부산 동쪽 끄트머리 등대. 등대 방파제 가는 길 바로 옆은 고리원자력발전소 담벼락이다. 고리원자력 너머는 울산이기에 길천은 부산 맨 끄트머리 포구이고 길천등대는 부산 맨 끄트머리 등대다.

"마을 가운데로 물이 흘렀대요." 등대 정식 명칭은 길천포항 방파제등대. 기장군 장안읍 길천리 바닷가에 있다. 왜 길천이냐는 물음에 장안읍사무소 예산회계담당 공무원 한결(27) 씨 대답이 물줄기처럼 시원하다. 마을 이장에게 들었다며 내력을 들려준다. 물이 흐르는 마을에 질맞이란 데가 있었고 질맞이 질과 하천 천이 합쳐 길천(吉川)이란다. 그 하천과는 다른 하천이겠지만 폭이 제법 너른 하천이 흐른다. 하천 저쪽은 월내, 이쪽은 길천이다. 두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라 해서 하천에 놓인 다리 이름이 월천교다.


길천등대는 외등대. 하나뿐인 등대다. 포구 왼쪽에 있어 붉다. 방파제등대는 하나뿐일 경우 뭍에서 봐 왼쪽에 있으면 붉고 오른쪽에 있으면 희다. 왼쪽 붉고 오른쪽 흰 쌍둥이등대에서 하나가 빠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등대 재질은 스테인리스. 대개의 등대가 콘크리트인 것을 감안하면 남다르다. 스테인리스는 녹이 슬거나 삭는 걸 방지하는 효과가 뛰어나다. 스테인리스에 붉은 색상 에폭시를 발라 효과를 더욱 높인 게 길천등대다. 페인트 일종인 에폭시는 날씨 변화와 물기에 잘 견디고 접착력이 강하다.

재질 못잖게 생김새도 남다르다. 등탑 꼭대기로 오르는 사다리가 밖으로 드러나 있다. 손잡이가 다닥다닥 박힌 굴뚝을 떠올리면 되겠다. 육지의 가장 낮은 곳에서 첫걸음을 떼는 사다리가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정직해 보이기도 한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면 박수를 쳐서 격려하리라. 방파제 바깥벽을 때린 파도가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로 오르고 파도소리가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로 오른다.

꼭대기 등명기도 사다리처럼 드러나 있다. 등명기는 등대의 핵심. 등대가 비추는 빛은 모두 여기서 나온다. 핵심이라서 등롱 안에 보호하는 게 일반적이다. 등롱은 무얼까. 새가 사는 집은 조롱, 등이 사는 집은 등롱! 길천 등불은 새장에 갇히지 않은 새처럼 자유롭다. 6초에 두 번을 깜박이는 등불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아무런 막힘도 없이 어두운 밤하늘을 훨훨 날아다닌다.

"광어 잡는 그물임더." 등대 들머리 어부 손질이 재빠르다. 오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어부다. 방한모에 방한 마스크에 옷차림이 단단하다. 밧줄에 매인 그물을 '커터칼'로 잘라낸다. 그물코는 어디랄 데 없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상태. 바다 밑바닥까지 풀어서 끌어당기는 과정에 그물코가 나간다. 요즘 잘 잡히는 어종은 광어 대구 도다리. 바다로 매일 나가서 어른 팔뚝만 한 고기를 예사로 잡아낸단다.

방파제 두 낚시꾼은 어째 쩨쩨하다. 손가락 크기 '꼬시래기'만 잡아낸다. 잡아내기는 연거푸 잡아내도 크기는 거기서 거기다. 꼬시래기 명당자리는 기역자 방파제 끝. 등대 바로 아래다. 육지 가장 낮은 곳에 선 사람이라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살이를 밝히는 등불이다. 경전 같다. "사람 사는 게 별것 있더나. 욕심내서 살아봐야 그게 그거지." 사람살이도 꼬시래기처럼 거기서 거기란 말씀이다.

낚시꾼은 말도 잘한다. 입을 열면 등불이 켜지고 다물면 꺼진다. 꺼내는 말 마디마디 깜박인다. 슬슬 술이 동하는지 '꼬시래기에 술 한잔, 꼬시래기에 술 한잔' 두 번인가 세 번을 그런다. 한잔 같이 하겠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니 마시기도 전에 어질어질하다. 어질어질해서 못 알아들은 척 자리를 뜬다. 이 엄동에 퍼지고 앉으면 좀 추울 것인가. 한 자리 붙박인 등대가 되어 꽁꽁 얼어붙을지도 모를 일이다.

갈매기는 얼어붙어 있다. 웅크리고 앉아선 꼼짝을 않는다. 갈매기가 웅크린 곳은 '삼발이'. 삼발이는 해안을 따라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삼발이마다 웅크리고 앉은 갈매기가 대리석으로 빚은 조각품 같다. 월천교 다리 아래는 백사장. 고작 한 뼘 두 뼘 백사장이지만 품은 넉넉하다. 밀려오는 파도를 일일이 품고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일일이 품는다. 갈매기 소리까지 품어 월천교 다리가 다 들썩인다.

대중교통은 몇 되지 않고 좀 뜸하다. 37번, 180번 시내버스가 다닌다. 노선은 인터넷 참조. 기장시장에서 마을버스 3번과 9번을 타도 된다. 월내 다음이 길천이다. 180번, 3번은 바다를 끼고 달린다. 기장바다는 멋을 한껏 부린 등대가 수두룩하다. 보는 족족 눈에 담아 둘 만하다. 식당은 다양한 편. 바닷가 통유리 중국집에 자리 잡자 등대가 깜박이기 시작한다. 홍등이 두 번 깜박인다. 홀로 깜박이는 외등이 외로워 보인다. 지혜로 똘똘 뭉친 성자는 원래 외로운 법이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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