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부산 등대] 4. 청사포등대
입력 : 2013-01-17 07:48:41 수정 : 2013-01-17 14:37:10
끝이 뾰족해서 성당을 닮은 등대 사랑하는 마음 담아 은은하게 비춰
첨탑도, 창도 뾰족한 청사포등대에서는 성당에 온 듯 마음이 경건해진다. 어느덧 밤이 찾아와 마치 사랑이라도 하듯 청사포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 불빛을 만나면 한껏 사랑받는 느낌이 든다. 사진=박정화 사진가누가 저런 불을 지폈을까
알아서 켜지는 불
당신이 오면
내 안의 불
알아서 켜지리
아무리 젖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으리
누가 저런 불을 지폈을까
알아서 꺼지는 불
당신이 떠나면
내 안의 불
알아서 꺼지리
아무리 불붙여도
절대로 켜지지 않으리
당신이여 오라
젖어도 꺼지지 않는
청사초롱 저
불을 따라서 오라
-동길산 시 '청사포등대'

최근에 그런 적 있는가. 사랑으로 아파한 적. 사랑은 이중적이다. 그리고 중독성이 있다. 아파할 줄 뻔히 알면서도 빠져드는 게 사랑이다. 최근에 사랑으로 아파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사람보다 백 배는 천 배는 행복한 사람이 당신이다.
등대 불빛은 바다를 꼬집는 불빛. 어떤 등대는 한 손으로 꼬집고 어떤 등대는 양손으로 꼬집는다. 한 번만 꼬집는 등대가 있고 두 번 세 번 달아서 꼬집는 등대가 있다. 꼬집힌 자리 또 꼬집혀 바다는 멍든다. 멍들어 시퍼렇다.
등대는 바다가 밉다. 미워서 꼬집고 자기 진정을 알아 달라고 꼬집는다. 언제나 같이 있으면서 언제나 떨어져 지내는 등대와 바다. 등대는 바다가 미워서 꼬집고 바다는 꼬집힌 자리 또 꼬집혀서 '아야아야' 신음소리를 낸다. 철썩철썩 신음소리를 낸다. 소리조차 멍들어 시퍼렇다.
청사포등대는 양손으로 꼬집는 등대. 그나마 한꺼번에 꼬집지 않아 다행이다. 한 손으로 꼬집은 다음 다른 손으로 꼬집는다. 두 번 세 번 달아서 꼬집지 않고 한 번만 꼬집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불빛이 꼬집을 때마다 바다는 사색이다. 푸르죽죽하고 불그죽죽하다. 청색 홍색 천을 두르고 불 밝힌 청사초롱이 저럴까.
청사포등대는 끝이 뾰족한 첨탑이다. 성당에 온 듯 마음이 경건하다. 창문도 뾰족해 삼각형이다. 저것들에 찔리지 않으려면 얼마나 경건하게 살아야 하나. 콘크리트 등탑 표면은 매끈하지 않고 쭈글쭈글하다. 그게 오히려 멋져 보이고 있어 보인다. 커튼 주름 같고 청사초롱 주름 같다.
청사포등대도 송정등대처럼 민락등대처럼 쌍둥이 등대다. 뭍에서 보면 오른쪽이 흰 등대고 왼쪽이 붉은 등대다. 명칭은 청사포어항 남·북 방파제등대. 등대가 비추는 불빛은 각각 녹등 홍등. 5초에 한 번 깜박인다. 녹등이 꺼지면 홍등이 켜지고 홍등이 꺼지면 녹등이 켜진다. 해상 등대는 세 번을 달아서 깜박인다. 암초에 세운 등 기둥, 등주다.

등대가 두 군데인 만큼 방파제도 두 군데다. 붉은 등대 방파제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이 일대가 뒤집힌 다음 지은 방파제다. 흰 등대 방파제는 태풍 매미로 뒤집힌 다음지어졌다. 붉은 등대 가는 길에 해녀들 휴식공간이 있다. 평상을 놔 두고 해산물을 판다.
등대는 외롭긴 외로운 모양이다. 불빛이 나만 따라다닌다. 이 등대에서 저 등대로 가면 불빛도 이 등대에서 저 등대로 따라온다. 질투도 심하다. 흰 등대에게 가 있으면 붉은 등대 불빛이 꼬집으려 덤벼들고 붉은 등대에게 가 있으면 흰 등대 불빛이 꼬집으려 덤벼든다.
꼬집힐까 겁나긴 해도 흐뭇하다. 뿌듯하다. 사랑받는 느낌이다. 나는 안다. 모르는 사람끼린 엔간해선 꼬집지 않는단 걸. 알기에 사랑하기에 꼬집는단 걸. 불빛이 들어오자 등대 꼭대기 유리창 안이 환하다. 난롯불을 켜자 환해진 실내 같다. 저 불에 손을 쬐고 싶다. 마음을 쬐고 싶다. 누가 저기에 불을 지폈을까. 불을 지펴 언 손, 언 마음을 쬐게 했을까.
'넌 내가 선택한 사람. 넌 나를 좋아할 사람.' '엄마 사랑해! 범수 사랑해!' 누구라도 저런 날 있었으리. 누구라도 저런 날 있으리. 마음이 꼬집혀 사람들은 등대에 글을 남기고 그 글이 다시 등대를 꼬집는다. 바다는 잔잔하다. 바다가 잔잔하니 소리도 잔잔하다. 꼬집혀서 아플 망정 아픈 소리를 내지 않고 아픈 티를 내지 않고 꾹 참는다. 바다도 아는 것이다. 등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청사포 밤바다에 비친 불빛은 하나같이 외롭다. 외로워서 사람을 따라다닌다. 등대가 그렇고 가로등이 그렇고 가게 간판이 그렇다. 청사포 밤바다에 가 보라. 그대가 어디로 가건 불빛이 그대를 따라가리라. 바다가 내는 소리도 그렇다. 외로워서 그대만 따라다닌다. 그대가 멈추면 소리도 멈추고 그대가 움직이면 소리도 움직인다.
"한치나 오징어는 뒤바꾸가 안 돼요." 누군가가 랜턴으로 바닷가를 비춘다. 물이 빠져 갯바위가 여기저기 드러난 모래펄이다. 낚시꾼인가 했더니 장어도 팔고 조개도 파는 가게 안주인이다. 단골이라 안면이 있다. 밀물 따라 들어왔다 빠져나가지 못해 버둥대는 한치나 오징어가 있는지 비춰 보는 중이란다. 그것들은 뒤로 헤엄치지 못해 물이 들어와야 빠져나간단다. 얼마 전 '이따만한' 것을 스무 마리나 잡았다며 팔뚝을 들어 보인다.
최근에 그런 적 있는가. 사랑에 빠져들어 버둥댄 적이 있는가. 한치나 오징어처럼 어쩌면 사랑도 '뒤바꾸'가 되지 않는 것. 앞만 바라보고 가는 것. 사랑에 빠져들면 아프지만 어찌 아프기만 하랴. 꼬집히고 꼬집혀 멍든 마음이 어찌 시퍼렇기만 하랴. 청사포 가는 길. 도시철도 2호선 종점 장산역 3번 출구로 나와 죽 올라가거나 5번 출구로 나와 2번 마을버스를 환승하면 된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