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신춘문예 - 희곡] 401호 윤정이네 / 현찬양
등장 인물
커트여자(28) 단발여자(32) 웨이브여자(24) 윤정(28)
"맨날 보는 얼굴이 어떻게 생각 안 날 수가 있냐?"
"엄마는 너무 오래된 가구라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빈소.
향냄새가 자욱하다. 상주는 보이지 않고 테이블 두 개가 있을 뿐이다. 여자 둘, 단발여자와 커트여자가 테이블을 하나씩 꿰차고 멍하니 앉아 있다. 처음 보는 사이인 듯 서로 말이 없다.
커트여자는 물 뚜껑을 엄지 손가락으로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딱, 딱 소리가 거슬리지만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여자들과는 다른, 구석의 공간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윤정이다. 윤정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여자들의 대화를 엿듣고 반응하고 웃기도 한다. 그녀들의 행동에 느끼는 감정대로 반응해야 한다. 그녀들은 윤정이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만질 수 있다. 윤정은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야 한다.
커트여자 죽었나?
단발여자 네?
커트여자 에어컨이요. 아까까지 나오다가 갑자기 안 나오네요.
긴 사이.
웨이브여자가 등장한다. 약간 숨을 몰아쉬면서 들어올까 말까 망설인다.
웨이브여자 저, 죄송한데 여기 윤정이 언니네 맞아요? 401호.
단발여자 '윤정이 언니네'요?
웨이브여자 (웃으며) '윤정이 언니네'래. 제가 이래요.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뭐라고 말해야 되지? 뭐죠?
단발여자 빈소요.
웨이브여자 맞다, 빈소.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났어요.
(신발을 벗으며) 한참 헤맸어요. 스마트 폰으로 약도를 찍어 봤을 때는 정류장에서 나와서 금방이었는데 걷다 보니 어딘지 영 모르겠는 거예요.
이리 저리 헤매다가 다리를 건너니까 금방이데요.
웨이브여자, 신발을 벗고 올라와서 거리낌없이 단발여자와 한 테이블에 앉는다.
웨이브여자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단발여자 테이블엔 물통이 없어서 커트여자가 자기 테이블에 있는 물통을 들고 자연스럽게 한 테이블에 모인다. 커트여자, 물을 따라 웨이브여자에게 준다. 웨이브여자 단숨에 물을 들이킨다.
웨이브여자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상복으로 입을 만한 게 없어서 겨울 정장을 꺼내 입었더니 더워 죽을 지경이에요.
많이 이상한가요?
커트여자 그저 웃는다.
웨이브여자 (단발여자와 커트여자에게) 윤정이 언니 가족분 되세요?
커트여자 아뇨. 저희도 문상하러 온 건데 아무도 없어서 어리둥절하던 참이었어요.
웨이브여자 (단발여자에게 친근하게 굴며) 우린 본 적 있죠?
단발여자 (부담스러워하며) 없는데요.
웨이브여자 본 적 있는데. 윤정 언니랑 분명 같이 봤을 거예요.
단발여자 어디서요?
웨이브여자 어디서 봤더라. 아무튼 어디서 봤는데. 만난 적 있는 건 확실해요. 제가 사람 얼굴 하나는 잘 기억하거든요.
단발여자 어쩌면 결혼식에서 봤나 보죠. 어쩌면 장례식이거나.
웨이브여자 그럼 결혼식이겠네요. 장례식은 처음이거든요. 그런데 원래 이렇게 아무도 없는 건가요?
단발여자 글쎄요. 이상하네요. 상주도 없고.
커트여자 화장실 가셨나 봐요.
단발여자 그런 것 치곤 너무 오래 안 오시는데.
침묵, 커트여자가 맥주병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입을 연다.
커트여자 여기는 맥주병이 크네요.
웨이브여자 그래요? 일반 맥주병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
커트여자 방금 결혼식엘 갔다 왔는데 거긴 병이 작더라고요. 물컵에 따르면 한 병이 다 비워질 정도로 작았는데 여기껀 크네요.
웨이브여자 결혼식장 술병이야 원래 작은 거잖아요.
커트여자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 다 상술이에요. 그렇게 팔면서도 오백밀리 값이랑 똑같이 받을 걸요? 결혼하는 사람들이 봉인 거지.
웨이브여자 그럼 죽은 사람은 봉이 아닌가?
단발여자 장사꾼도 죽기는 할 테니까.
사이.
웨이브여자 여기 진짜 이상해요. 상주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없고. 빈소에 국화꽃이랑 윤정 언니 사진은 있는데 그것 빼곤 아무 것도 없잖아요.
꼭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아요.
단발여자 어쩌면 우리가 너무 일찍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커트여자 일찍이라뇨. 오늘이 둘째 날 아니에요?
웨이브여자 오늘이 몇 쨋날이죠?
단발여자 어쩜 너무 늦게 왔나봐요. 발인이 언제였죠?
커트여자 모르겠어요. 아. 문자 받은 게 있는데.
커트여자, 웨이브여자 전화기를 확인해 보지만 문자를 찾을 수가 없다.
커트여자 지워졌나. 어딨는지 모르겠네요.
웨이브여자 전 밧데리가 다 되어서. (사이) 안내소에 물어보고 올까요? 발인 들어갔을지도 모르니까.
커트여자 그래요, 부탁 드려요.
웨이브여자 퇴장한다. 침묵. 커트와 단발, 별달리 할 말이 없다. 커트가 먼저 말을 꺼낸다.
커트여자 윤정이 최근까지 만나셨어요?
단발여자 네. 아니, 아니오.
커트여자 만났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단발여자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커트여자 네에.
단발여자 (사이) 연락 받고 너무 놀랐어요.
커트여자 사고 같은 걸까요?
단발여자 대답하지 않는다. 긴 침묵.
커트여자 윤정이 최근 이야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제가 정말 윤정이를 만난 지 너무 오래되어서요. 그간 연락도 전혀 못했고.
단발여자 얼마나 최근이요?
커트여자 그냥 최근이요.
단발여자 글쎄요.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윤정이는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고 종일 집 밖으로 안 나왔고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고….
커트여자 (사이) 네?
단발여자 수능이요. (사이) 웃기죠?
커트여자 그러면 대체 몇 수야. 재수, 삼수, 사수, 오수…(손가락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단발여자 갑자기 왜 대학이냐고 했더니 약사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윤정 약사가 되려고.
커트여자 약사요? 약 지어 주는 약사?
단발여자 뜬금없이 웬 약사야? 의사도 아니고.
윤정 예전에 왜 감기약 사러 우리 같이 약국 갔을 때 있잖아.
온 몸에 문신한 깍두기 아저씨 본 날. 우리 그때 괜히 무서워서 구석에 있었잖아. 그런데 그 아저씨 말 잘 듣는 초등학생 같았지. 자기 키의 반 밖에 안 되는 약사한테 가서 공손하게 "저 방구가 삼일 째 멈추지를 않는데 뭐가 잘못된 건가요" 해서 우리 무척 웃었지.
단발여자 아아- 기억 난다.
윤정 아무리 나쁜 사람도 자기 몸 아플 때는 착해지니까 영원히 그런 착한 사람들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해서.
단발여자 가끔 보면 넌 텔레토비 동산이라도 찾고 있는 것 같아. 모두가 행복하고 따뜻하고 눈만 마주치면 웃는 그런 곳. 하지만 그런 곳은 세상에 없어.
윤정 넌 항상 너무 똑똑해. 내가 바라는 건 진실이 아닌데.
커트여자 윤정이랑 어떤 관계였어요? 동창? 직장 동료?
단발여자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커트여자 네?
단발여자 (강조하며)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긴 사이.
여자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웨이브여자가 들어온다.
웨이브여자 안내소에 아무도 없었어요. '출타중'이라고 팻말만 하나 붙어 있었어요. 전화번호도 하나 안 적혀 있더라고요.
커트여자 일 참 대충하네.
웨이브여자 (웃으며) 데스크에 레모나가 있길래 훔쳐 왔어요. 하나 드실래요?
웨이브여자, 레모나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커트여자 진짜 오랜만에 본다.
웨이브여자 저도 좋아해요.
단발여자 (윤정에게) 그렇게 좋아?
윤정 맛있잖아.
단발여자 난 맛있는지 모르겠던데.
윤정 꼭 사람 같다니까. 싫다, 싫다 하다가도 먹다 보면 정 들어서 익숙해지거든. 그렇게 시다가도 눈물 한 번 흘리고 나면 또 입에서 단맛이 돌고.
단발여자 아무튼 그만 좀 먹어. 키스할 때 신트림난단 말이야.
윤정 시긴 뭐가 셔.
윤정, 단발여자에게 키스한다. 그리고 웨이브여자와 커트여자에게도 키스한다.
윤정 (단발여자와 키스하며) 봐봐. 달콤하지?
웨이브여자 달콤하죠? (그리고 웨이브여자에게도)
단발여자 하나도 안 달구만. 눈물나게 시네. (그리고 커트 여자에게도)
커트여자 그렇게 셔요? 난 괜찮은데.
단발여자 좀 덥지 않아요?
웨이브여자 네. 더워요.
커트여자 더워서 죽을 것 같아요.
웨이브여자 문 좀 열까요?
단발여자 네. 문 좀 열어요.
창문을 연다. 매미 소리가 들린다.
커트여자 벌써 여름이네.
웨이브여자 진짜 매미소리 맞아요? 우리 집 근처에서 우는 매미랑 소리가 좀 다른 것 같은데.
커트여자 참매미예요.
웨이브여자 소리만 들어보고 어떻게 알아요?
윤정 맴맴맴 하는 건 참매미, 쓰름쓰름 하는 건 쓰름매미.
커트여자 진짜?
윤정 거짓말이야.
커트여자 (매미가 운다) 가까이서 우는 것 같은데. (어디 공중을 바라보며) 저기 있다. 거미줄에 걸렸네. (사이) 그래도 계속 우네. 곧 죽을 텐데.
윤정 금방은 안 죽지.
커트여자 사왔어? 그거.
윤정 (주머니에서 말보로 레드와 라이터를 꺼내어 준다.) 여기.
커트여자 선생한테 안 들켰지?
윤정 내가 들킬 사람이냐?
커트여자 매번 고맙다.
단발여자 문도 열었으니까 담배 피워도 되겠죠?
웨이브여자 여기 재떨이 있는 거 보니까 피워도 될 것 같아요.
커트여자 상갓집에서 담배 안 피우면 어디서 피웁니까.
세 여자, 윤정이 준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윤정 이쪽으로 뿜지 마. 냄새 배.
커트여자 냄새 배라고 그러는 건데.
윤정 나쁜 년.
커트여자 담배 심부름 1년 만에 알아낸 사실이 겨우 그거냐.
윤정 넌 진짜 나쁜 년이야. 지옥 갈 거야.
커트여자 나는 지옥 안 가. 우리 엄마가 새벽기도 나가서 나 대신 하나님한테 사과하고 다니시거든.
윤정 그럼 지옥은 내가 가겠네. 새벽기도 가주는 엄마 없어서.
커트여자 (사이) 담배 펴 볼래?
윤정 됐어. 좋지도 않은 걸.
커트여자 안 좋은 거면 사람들이 몇 천년 동안 피우고 있겠냐? 좋은 거니까 피우는 거지.
커트여자, 자기가 피우던 담배를 윤정에게 준다. 윤정 망설이다가 피운다.
커트여자 천천히, 숨을 깊숙히 넣어. 끝까지 들이마시고 천천히 뱉어. (사이) 어때?
윤정 토할 것 같아. 가슴이 탁 막히고 머리가 팽 돌아.
커트여자 처음엔 다 그래. 익숙해지면 괜찮아져.
윤정 맛없어.
커트여자 원래 멋있는 건 맛이 없는 거야. 그래도 이게 꼭 사람 같다니까. 싫다, 싫다 하다가도 자꾸 보면 정이 들어서 익숙해지거든. 익숙해지면 못 끊지.
윤정 너처럼?
커트여자 (사이) 너 많이 컸다.
윤정 네가 키웠잖아.
커트여자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만.
두 사람 손을 잡는다.
단발여자 말보로 오랜만이네요.
웨이브여자 정말로요. 고등학교 때 많이 피웠는데.
커트여자 고등학교 땐 다들 말보로였죠.
웨이브여자 뭣도 모르고 이게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단발여자 제일 독하니까.
웨이브여자 냄새도 제일 안 빠지고.
커트여자 이제는 에쎄가 좋아요. 얇고 피운 것 같지도 않아서.
단발여자 윤정이는 계속 말보로를 피웠어요.
웨이브여자 왜요?
단발여자 뭐든 오래가잖아요. (사이) 뭐든.
윤정, 커트여자의 손을 만지작거린다.
커트여자 윤정이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나요. (윤정이를 보며) 영정사진을 보면 제가 아는 윤정이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있어서 이상하기만 해요. 윤정이와 조금 닮았네, 싶기는 하지만 윤정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윤정 나도 엄마 얼굴이 기억 안 나는데.
커트여자 어떻게 맨날 보는 얼굴이 기억 안 날 수가 있냐?
윤정 같이 산다고 해서 매일 보는 것은 아니야. 벽지무늬가 생각이 잘 안 나는 것처럼 엄마는 너무 오래된 가구라서 가끔 그게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차라리 엄마가 죽은 사람이라면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어렸을 때는 그 사람이 엄마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 엄마는 어디에 돈 벌러 간 거고 돈이 충분히 모이면 다시 날 데리러 올 거라고. 그래서 항상 진짜 엄마를 기다렸어. 숙제를 하면서 티비를 보면서 항상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커트여자 난 가끔 네가 무서워. 넌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매미가 운다.
단발여자 몇 년을 땅 속에서 살고 겨우 땅 위에 올라와서는 한 달도 못 살다니.
가여워요. 오랜 무명생활을 거친 뒤에 성공하자 마자 죽는 수퍼스타 같잖아요.
웨이브여자 거꾸로예요.
땅 아래에서 진짜 삶을 살다가 타지에서 죽는 거죠. 불쌍하게도.
먹고 자고 놀고 바깥 세상에서 만날 다른 사랑에 대한 꿈을 꾸고. 하지만 땅 위로 올라온 뒤부터는 아이를 낳고 죽는 일 밖에는 할 게 없죠.
"내가 배신했어, 덕분에 넌 배신자가 아니지"
"우린 맞는 게 없어, 그거 하나만 마음이 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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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나리 기자 n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