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옹골찬 농사꾼 천규석
꿈 꾸며 살 수 있어 선택한 흙 "제 눈엔 보입니다. 공생의 싹이…"
사람들이 나, 천규석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개의치 않는다. 나는 농부인데 철학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옹골찬 농사꾼'이라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만 좀 낯간지럽다. 어떤 이는 근본적 환경주의자라고 한다. 더 나아가면 극단주의자. 반국가주의자, 아나키스트라고도 하더라. 농사꾼, 진보 농민운동가, 생태운동가, 생태학자, 저술가, 생협운동가…. 내 이름 석 자를 이야기할 때 수식하는 단어들은 다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칠십이 넘도록 땅과 벗하며 살아왔고, 소농이 세상을 살린다고 주장했으니 더도 말고 농사꾼이라면 딱 맞는 말이다.
전국 석차 상위권이었지만
농사일 거들어야 했던 장남
농고 진학해 농사만 지었다
"내가 옳고 그들이 그르다면
침묵할 생각이 없다"
진보세력도 정신 못 차리면
야단도 치고 호되게 비판해
■ 나는 다 내려놓았던가
기득권을 비판해 왔다. 그런데 나는 대학 졸업장이 두 개나 된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고,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졸업장도 있다. 나이 일흔다섯인데 흔치 않은 학벌이다.
그럼에도 농사를 짓고 있으니 나 같은 이는 조금 희귀하다.
책도 몇 권 썼고, 이곳저곳에 강연도 조금씩 다닌다. 생활협동조합 대구한살림도 운영하고, 고향인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작은 농장도 있다.
나는 잘난 체하는 놈들을 싫어한다. 개인이 싫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생각을 비판한다. 거짓을 말하면 야단을 친다. 반성하지 않으면 욕도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 "조금 심하십니다" 하며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그른 것에 대해서 침묵할 생각이 없다.
작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거나, 진보세력이 큰 권력을 잡고 난 뒤 정신을 못 차리면 매우 비판한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이 있다. 내 대학 후배이기도 하다. 그가 쓴 책에 대해 비판적 접근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우려를 많이 했다.
"그래도 온 국민이 좋아하는 책인데 선생님이 너무 혹독하게 비판하시면 안 됩니다."
평소 내 의견에 맞장구를 치던 사람들조차 나를 염려했다. 나는 문화유산은 당 시대 지배자들의 민중 착취라는 이면을 반드시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감추어진 수탈과 착취의 역사를 외면하면 안 된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유익하기보다는 문제가 더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루카치를 만나면 루카치를 죽이는' 삶을 살려다 보니 기실 나도 남들보다는 무척 많이 가졌다는 생각이다.
■ 농사보다 공부가 좋아
내 고향은 경남 창녕군 영산면 죽사리다. 지금도 주민등록이 그렇게 돼 있다. 내가 다소 고리타분할 정도로 비타협적인 것은 내 고향 영산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본다.
영산은 탁기탄가야로 신라에 쉽게 동화된 창녕의 비화가야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있다. 영산줄다리기와 영산쇠머리대기라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가 두 개나 있을 정도다.
우리 집은 그나마 중농이었다. 논이 열 마지기(1마지기는 200평)였고, 밭도 열 마지기 정도였다. 논이 스무 마지기(4천 평)가 넘으면 대농 부자 소리를 들었으니 중농이 맞는다. 7남매가 거들었지만 농사일은 감당 못할 만큼 많았다.
공부는 잘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전국 단위 국가고사가 처음 시행되었다. 전국 석차가 상위권이어서 경기고나 부산고에 갈 실력이 충분했다.
중학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막냇동생은 겨우 다섯 살이었다.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기에 영산농고에 진학을 했다. 농고에 가니 공부는 뒷전이고 말이 실습이지 온통 농사일이었다.
큰아버지는 내 혼인을 서둘렀다. 자식이 일곱이나 딸린 아버지의 재혼보다는 장남인 내가 결혼하는 게 낫다며 내린 결론이다. 아내를 맞은 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대처에서 공부만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부산으로 훌쩍 떠났다. 가출을 감행했다. 얼마 동안 헤매다가 초량에서 부두일을 하는 자형 셋방에 머물렀다. 자형도 돈벌이를 위해 혼자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골로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야간학교에 다니려니 대신동 과자 공장과, 친구의 아이스케이크 장사도 도왔다. 그러다가 제대로 못 먹은 몸에 탈이 났다.
1년 만에 고향집으로 내려와 6개월 이상 요양을 했다. 그리고 2년 뒤 영산농고에 복학을 했다. 고등학교를 5년간 다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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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대구한살림을 꾸려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
1960년 고향서 부정투표 목격
대학생은 투표용지조차 안 줘
'투표무효 다시 하라' 5명이서
플래카드 행진 벌이다 연행돼
'민주캠프' 원주서 오라 했지만
일할 사람 부족한 고향 택했다
도농 공존하는 '공생농두레'
비록 실패했지만 다시 꿈꾼다
전기·수도 없는 공동체마을을
■ 드디어 대학생이 되다
어른들은 면서기나 순사 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다.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2년째 초급대학이지만, 졸업을 하면 교사 자격증이 나왔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3월부터 입식과외를 했다.
초급대학은 입학하자마자 졸업이었다. 친한 친구가 너덧 있었다. 1학년 겨울방학을 지나고 나니 과 친구 2명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부산고 출신인 이 친구들은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색맹 등의 이유로 불합격되자 서라벌예대로 온 이들이다.
어느 날 동숭로를 걷는데 친구 둘이 서울대 교복을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서라벌예대를 그만두고 서울대에 재시험을 쳤다고 했다.
난 '말이라도 해 주지' 하며 나무랐다. 속으론 부러웠다. 당시 대학생도 교복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대가 아니면 잘 입고 다니지 않았다. 서라벌예대는 베레모가 독특했다.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모자인데 직물로 짜서 아주 고급스러웠다. 모자만은 서울대보다 좋았다.
그런데 한번은 찻집에서 서울대 애들이 "저 모자는 뭐야. 촌스럽게"라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난 서울에 있는 대학은 다 서울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보통은 2년을 마친 친구들이 고대나 성대로 편입을 하는데 나는 다시 시험을 쳤다. 3학년이 되어야 하는데, 다시 1학년이 되었다.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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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규석 선생의 삶은 한번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한결같다. 그는 곧고 바른 말을 거침없이 해댄다. 경우에 어긋나면 누구라도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 그렇게 모질게 이야기한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그치기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김병집 기자 bjk@ |
■ 시대에 눈을 뜨다
1961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니 대학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4·19 민주혁명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사장될 위기였다.
한 해 전인 1960년 4월 가정교사 광고를 내러 한국일보에 갔다가 고대생 4·18 데모에 휩쓸리게 되었다. 동대문5가에서 깡패들에게 죽도록 얻어터졌다. 그해 3월에는 고향 영산에서 부정선거를 직접 목격했다.
고향 영산에 투표를 하러 갔는데 대학생들은 아예 투표용지를 주지 않았다. 영산 출신 대학생 5명이 모였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분개하며 시장 포목점에 가서 플래카드에 쓸 천을 구했다. '투표무효 다시 하라'고 썼다.
3월 15일 대학생 다섯 명이 플래카드를 앞세워 투표장 앞까지 행진을 하는데 어른들은 아무도 동참 않고 어린 조무래기들만 우리를 따라 다녔다. 그때 영산중 은사이던 조성국 선생님이 멀찍이 서서 우릴 바라보고 계셨다.
4·19 이후 교원노조 활동으로 해직된 조 선생님은 내가 대학 졸업 후 귀향을 했을 때 "그때 부정선거 데모를 함께 못 해 매우 부끄러웠다. 너희들 때문에 교원노조를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투표장 입구에는 지프차를 타고 온 창녕경찰서 형사 10여 명이 있었다. 우린 달랑 들려 영산지서로 붙들려 갔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다. 본서로 이첩되기 직전 영산중 역사 담당 하봉주 선생님께서 "내 제자들이니까 선처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을 하셨다.
하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 영산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말 그대로 영산의 큰어른이셨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풀려났다.
■ 박정희가 나를 만들었다
5·16 군사 쿠데타 뒤 박정희의 군대가 학교를 점령했다. 이후 대학 4학년이던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3까지 학생운동은 내 전부가 되었다.
6·3 때는 4·19 때보다 더 많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군사정부의 총칼에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서울대 문리대는 학생운동의 진원지였다. 입주 가정교사를 하는 처지라 저녁이면 밥벌이를 위해 귀가를 해야 했다. 그래서 체포되거나 주동자가 되는 건 면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고민이 깊어졌다. '대학원을 갈 것인가. 언론사 취직을 할까. 교사가 될까?' 운동을 어떻게 계속할지 고민을 했다.
나는 서울대 나온 것만으로도 특권을 가졌다. 대학원에 가면 더 많은 특권을 가질까 봐 두려웠다. 취직하면 해직을 우려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농사를 짓겠다고 생각했다. 농사꾼은 우선 먹는 문제가 해결된다. 해고될 위험도 없다. 시간도 많이 난다.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 가질 단 하나의 직업이었다.
그 즈음 강원도 원주로 오라는 얘기가 많았다. 미학과 1회 선배인 장일순 선생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70년대 원주는 민주캠프였다. 김지하 이창복 등이 원주에 있었다.
나중에 한살림 운동을 함께 시작한 내 대학 동기 박재일은 그때 원주로 갔다. 나는 일할 사람이 넘쳐나는 원주보다는 고향 영산을 택했다.
1965년 서울에서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 다시 농사꾼이 되다
은사 조성국 선생님이 해직된 후 참여한 창녕 경화회는 농민자치조직으로 그 활동이 대단했다. 난 편집일을 맡아 소식지를 만들었다.
양파 농사도 지었다. 남들보다 수확이 좋았다. 대학 나온 사람이라 그런지 농사도 잘 짓는다는 말을 들었을 땐 우쭐했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서울대까지 나온 놈이 농사를 짓고 있는 것에 대해 아버지의 실망은 컸다. 그래서 학교를 세운 친구를 도와 한 1년 지역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시간 강사로 부산에 있는 전문대학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부산의 대학에서는 석사학위만 따면 교수로 임용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나는 포기했다. 들판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1979년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후 혼자 8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힘이 부쳤다. 6천 평 농장을 정리했다. 1만 원에 판 땅이 2년 뒤에 30만 원까지 치솟았다. '손해 볼 짓만 골라가며 한다'며 자책했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대구에 작은 아파트를 하나 마련했다. 팔고 남은 땅이 조금 있어 대구와 창녕을 오가며 농사는 계속했다.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이 1985년 원주에서 처음 생겼다. 생협운동 초기부터 함께한 나는 1987년 서울한살림 초대이사를 맡았다.
1990년에는 대구한살림을 만들었다. 5년 뒤 회원들의 회비를 모아 자급과 자치를 실천하는 공생농두레 농장을 꾸렸다. 창녕군 남지읍 수개리에 마련한 8천 평 농장이다. 수개농장은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기지였다. 이후 5년간은 농장에 매진했다. 소유는 하되 공동으로 경작하고 이를 도시인들과 나눠 소비하는,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공동체가 공생농두레였다.
■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
수개농장은 생각만큼 잘 운영되지 않았다. 농사꾼이 되고자 한 청년들은 몇 해를 못 견디고 떠나버렸다. 두레농장 실험은 현재 실패했다. 농장 자리는 고속도로 예정지가 되어 잘려나갈 처지다. 농장은 곧 정리할 생각이다.
한살림도 권력화되었다. 중앙은 비대해지고, 관료화가 되었다. 중앙의 이사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리를 만들고, 권력을 유지하려 든다.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한살림 정책 회의에 공정무역 제품인 커피와 설탕을 팔자는 안건이 올라왔다. 호되게 비판을 했다. '윤리적 소비'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알렸다.
적어도 한살림만큼은 로컬푸드를 쓰고, 노예무역을 온존시키는 커피와 설탕 제품을 팔지 말자고 호소했다. 다행히 한살림에서는 아직까지 설탕과 커피를 판매하지 않는다.
내가 커피를 안 마시는 이유가 있다. 지역 자급이 원칙인데 나 혼자라도 안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수입반대를 외치면서 커피를 마시면 모순 아닌가.
나는 늘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권력화되지 말자고. 내가 글을 강하게 쓰는 것은 사실 나에 대한 채찍이다. 글을 써 놓고, 글처럼 살려고 평생 노력해 왔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거창 산골짜기 해발 700m 마을에 새로운 공동체 마을을 준비하고 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마을이다. 행정에서는 전기를 공짜로 넣어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4천 평의 땅에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있다. 공생농을 실천할 공동체 마을, 두레에 대한 내 희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