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그림, 깎새… 50년째 미술용어 순우리말 작업 헌신
찍그림, 찍그림꾼?
판화가 이용길(74) 씨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판화라는 것이 나무나 금속, 돌 따위에 그림을 새기고 색을 칠한 뒤 종이나 천을 대고 '찍어' 만든 그림이니 '찍그림'이 옳다는 설명이었다. '찍그림'은 아직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이다. 그러나 그를 비롯해 부산 미술계의 후학들은 이 단어를 이미 일반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용길 판화가…분류 카드만 10만 장
국어사전 100여 권에 북한어사전까지
그는 부산 미술계의 1세대 판화가다. 그의 말을 빌리면 '찍그림꾼'이다. 하지만 그를 더 의미있게 한 것은 판화가 아니라 한글이었다. 그는 각종 일본식 미술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꿔 작은 카드 종이에 담는 작업을 올해로 꼭 50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 결과물이 카드 종이로 10만 장을 웃돈다. "서양의 각종 미술용어가 거의 다 일본을 거쳐 들어왔어요. 그러다 보니 온통 한자어 투성이입니다."
그는 한자어와 외래어를 순우리말로 고쳐 썼다. 판화를 '찍그림'이라고 하듯 회화는 '칠그림', 사진은 '빛그림', 조각은 '깎새', 아틀리에는 '그림방', 갤러리는 '폄터', 개인전은 '홀폄', 단체전은 '함께폄'이라고 했다. "지난 1962년 낙동중학교 미술교사로 있을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술을 좀 더 쉽게 가르치고 싶었어요. 솔직히 아틀리에, 회화, 갤러리가 쉬운 단어는 아니잖아요."
재미로 시작된 작업은 이후 덕명여중, 덕명여고, 동성고로 자리를 옮겼을 때에도 멈춰지지 않았다. 심지어 정년퇴직 이후에는 아예 서재에 틀어박혀 순우리말 작업에 몰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수시로 사전을 샀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구입된 국어사전이 무려 100여 권에 이른다고 그는 답했다. 표준국어대사전, 우리말갈래사전, 우리말분류사전, 말본사전, 겨레말갈래큰사전…. 책장에 꽂힌 대사전만도 수십 권이었다. 그중에는 1949년 영창서관 발간으로 표기된 '조선어사전 수정증보판'도 있었다. 누런 표지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더러 일본에 가서 북한어 사전도 샀습니다."
그는 이 같은 순우리말 작업에 대해 종종 컴퓨터 입력을 제의받았다. 하지만 손사래를 쳤다. "컴퓨터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못 찾고 있습니다." 그는 남에게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배우기 위해 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매일 몇 단어라도 외웁니다." 그의 서재에 있는 옷걸이에는 옷 대신 카드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는 지난 2007년 부산 미술계 관련 기사 스크랩북 100여 권과 미술서적 1만 권 등을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후에도 그는 부산에서 발행되고 있는 일간지와 미술전문지를 매일 구독하며 부산 미술계의 동향을 정리하고 있다. 이른바 '부산미술일지'다. "지금 10권을 쓰고 있습니다." 일지에는 반듯한 글씨로 전시회 제목, 참가 작가, 전시 날짜, 장소, 관련기사에 대한 목록이 씌어 있었다. 각 날짜에는 큰 봉투도 하나씩 연결됐다. 해당 일자에 열린 전시회의 소책자와 관련 기사 스크랩이었다.
이밖에 그는 병따개와 열쇠고리도 1천여 개 갖고 있다. 대단한 수집벽이다.
백현충 기자 cho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