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놓고 질러라, SNS 익명게시판 '대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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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과 억압에 찌든 쳇바퀴 삶, 짜릿하고 속시원하게 털어내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해 익명성이 완벽하게 보장된 '대나무숲(이하 대숲)'. 눈치볼 필요 없이 애환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대숲이 트위터에서 번성한 것은 SNS에 익숙한 세대들이 제대로 고른 최상의 보금자리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짜릿한 손맛, '눈팅'의 즐거움

새삼 대숲이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은 의외로 질긴 생명력 때문이었다. 반짝 인기를 끌다 사라질 줄 알았는데, 꼬리를 감추는 대신 분야별로 끊임없이 번져나갔다. 디자인회사와 우골탑, 홍보대행사, 출판사, 신문사 등 각 분야에서 출몰한 대숲에서는 쉴 새 없이 넋두리가 번져나왔다. '시월드 옆 대나무숲' 등 인기 대숲은 수차례 계정이 폭파되고 해킹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시월드 옆 대나무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차례 계정이 바뀐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연이은 공격에도 명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 꼭꼭 숨겨뒀던 며느리들의 불만과 설움이 많은가 보다.


SNS로 자기 속내 드러내는 해방구

익명의 공간서 불특정 다수와 교감

새로운 놀이문화로서의 모습도 보여



글을 더듬어 나갔다. '눈팅'(댓글을 남기지 않은 채 눈으로만 보는 것)의 즐거움이 꽤 쫄깃하다. 며느리들에게 명절은 고통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가위 전후로 글이 대거 올라왔다. 아무 데도 털어놓을 곳이 없어 대숲을 찾았다는 이, 아들 손자 안부는 챙기면서 정작 며느리는 챙기지 않아 섭섭하다는 이, 큰동서와 차별하는 시어머니가 싫다는 이, 얼굴 보자마자 돈 소리에 어이 없었다는 이 등등. 하소연은 끝이 없었다. 시집살이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이들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졌다. 무릎을 탁 칠 만큼 공감되는 글도 보였다.

한편으로는 '난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야'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나 자신이 몹시 한심해졌다. 글을 읽다가 문득 지난 추석 때 첫 명절을 맞은 올케 얼굴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친정 가야 할 올케를 붙들어맸던 게 떠올랐다. 나도 어느 틈에 '골 때리는' 시누이가 된 셈이다. 시월드 옆 대숲에 비슷한 글이 올라오더라도 마음 굳게 먹기로 했다. 쿨하게 넘어가는 걸로!

만날 눈팅만 하다가 용기를 냈다. 한 대숲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글 한 줄을 남겼다.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단어를 고르느라 짧은 글을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다. 겹겹이 싸인 익명의 공간 속에서조차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신중을 기하는 나 자신과, 별것 아닌 얘기조차 익명성에 기대 말해야 하는 비겁한 현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내 글 위로 수많은 글들이 올라와 묻히는 것을 보고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시원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뭔가 쏟아냈다는 홀가분함으로 눈앞이 시원해졌다. 부끄러움과 카타르시스의 공존.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여야 하는 사람들의 공간다웠다. 그나저나 짜릿한 손맛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이 맛에 익명의 글을 쓰나 보다. 어디서 무슨 글을 썼는지는 절대 묻지 마시라. 소심한 기자, 끝까지 노코멘트다.




#불만·불통의 삶에 숨통 틔우는 해방구

아무리 생각해도 대숲, 참 특이하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생판 모르는 사람과 단지 관심사가 같다는 이유로 공유하다니. 온전히 '나'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과거 익명 게시판과는 차원이 다른, 익명의 결정체다. 물론 최근 게시판 도배 테러가 일어나면서 비번을 숨기는 대숲이 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비밀번호를 게시판에 공개해 누구나 글을 쓰도록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대숲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경직된 사회문화와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구조, 인터넷 활성화에 따른 SNS를 통한 활발한 소통을 꼽았다. 한국정보화진흥원 고영삼 박사는 "너도 나도 이기기만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입시, 취업, 승진 등 삶의 모든 단계에서 평가를 받고 등수가 매겨지는 등 억압적인 요소가 강한 현실 속에서 대숲 출현은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우리 삶에 알게모르게 침투한 감시에 대한 불만이 대숲을 통해 분출됐다는 시각도 있다. 중세 시대의 가면 무도회나 축제, 우리나라의 탈춤 등 익명의 장은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 같은 익명성의 보장은 통치자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정치 수단이기도 하다. 자칫 혁명으로 치달을 수 있는 민중의 불만을 짧은 시간 내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익명의 공간이 크게 줄었다. 악플을 막고 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만들자는 좋은 취지로 인터넷 실명제가 실시됐지만, 되레 언로만 막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소통의 장이 줄어든 현실에서 대숲은 답답한 속내를 속시원하게 털어놓고 불특정 다수와 교감하는 창구 역할을 해 낸다.

부산대 사회학과 이일래 강사는 "대숲의 번창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소통의 창구가 줄어들었다는 방증이다. 조직에 대한 불만,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내부 고발자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한몫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숲은 민중의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재미 추구하는 B급 정서의 또다른 모습

대숲에 있어 '재미'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대변되는 B급 문화는 SNS도 강타했다. 사회적 약자들의 거침없는 발언은 정치적이거나 진중한 고민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낳는다. 가벼운 불만 토로는 SNS 특성과도 잘 맞아떨어져 새로운 놀이문화로 번졌다. 무책임한 발언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초창기 대숲에서 보였던 무질서한 모습과 달리 최근에는 일정 부분 자정 작용을 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고 박사는 "대숲이 일시적인 반짝 아이템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범위가 확대되며 지금껏 이어지는 것은 속 시원한 발언이 주는 통쾌함에서 전해지는 재미 덕분이다. 읽는 순간에도 휴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대숲의 또다른 강점"이라고 분석했다.

대숲이 번성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시대에 대한 불만과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 길이 없는 이 시대 민초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고민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는 긴장의 연속에서 불특정 다수의 공감은 큰 힘이 된다. 부산대 효원심리센터 홍창희 센터장은 "대숲에서는 내가 느끼는 불만과 아픔이 사실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위로받으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크다"고 평가했다.

최근 일련의 대숲 도배 사태는 특정 집단에 대한 불만 혹은 또 다른 형태의 불만을 표출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대숲이 쉬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전문가들은 또 다른 대숲 혹은 대숲 역할을 하는 다른 형태의 공간이 생겨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불만을 토로할 공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는 없는 곳이라고 했다. 상황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위로받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란다. 다양한 설움이 채워지지만 개인으로 놓고 보면 '언젠가는 떠나야 할 숲'. 홍 센터장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울린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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